강진 정자의 최초 '회선정'
강진 정자의 최초 '회선정'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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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문사고전연구소장>
▲ 병영 하고마을 전경

○ 신선들이 모인다는 회선정(會仙亭)은 하고성(下古城)마을의 서쪽 등성이인 섬등(島山登)에 있던 강진최초의 정자였던 것 같다. 그 기능은 알 수 없지만 사방을 둘러보면서 바람을 쏘였거나 아니면 학자가 제자도 가르치던 강학(講學)의 기능을 갖춘 거처할 방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는 마을 명칭, 관련유적, 남긴 시의 순으로 펼쳐 보이고저 한다.

 

마을명칭

○ 하고마을에는757년부터 도강현 이라하던 치소를 두었는데 1417년에 병영을 설치하고부터는 보통의 마을로 변모하게 되었다. 도강현이라 하던 처음에는 면의 명칭을 무엇이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고려때인 1172년은 산계소(山計所), 병영을 설치하고 나서는 영하(營下), 17세기부터는 고군내(古郡內)1789년경부터는 로하(路下), 1923년경은 고군(古郡)이라 하다가 1931년부터는 병영이 있던 곳이라 병영면이라 하여 지금껏 사용하여온다. 마을의 명칭은 병영을 설치 하고나서는 고성리(古城里), 17세기 무렵부터는 상고성과 중고성으로 나뉘고 19세기 초에는 중가(中加)와 건내(件乃)가 생겨나게 되어 이 무렵부터는 전체를 말할 때에는 고성5리(古城五里)라 하게 되었다.

 

관련유적

 

○ 도강현과 병영일대에 관련된 유적으로 추측이 되는 곳을 적어보자 면은 상고마을은 테두리 봉의 말타기 훈련과 접시 봉, 중고마을은 뒷등343번지의 향교(鄕校)터와 박병주 소장 문서 중 병영의 유학생 인원증가 요청서, 그리고 우물이요, 하고마을은 54번지의 옥사(獄舍)터, 69번지의 빙고(氷庫)터, 89번지의 병사 맞이하던 터, 134번지 섬등의 회선정터, 183번지의 동헌(東軒)터, 208번지의 관덕정(觀德亭)터, 470번지의 과녁 터, 초분골의 도자기 편 섬 등의 기와 편 등이 있다.

 

그 다음 동쪽 건너 연못 근처인 1-1번지는 국가의 문서를 보내던 곳인 배전각(徘箋閣)이 있었고, 1698년에 가선동추, 1730년에 숭록대부(종1)를 유한계(劉漢啓)가 수직(壽職)으로 증직 받은 기념으로 양한조(梁漢祖)가 감독하여 17세기에 축조하였다는 성동323-3번지의 홍교(紅橋)가 있다. 이 밖에는 농사짓기 위해 흐르는 물을 둑을 쌓아 막아놓은 제언(堤堰)이 있는데 병영쪽은 1765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에 고군내면의 남서리(南西里)에 1차제(一次堤 8,400.5척), 중고리 2차제(4000.30척)가 있고 작천쪽에는 초곡면(草谷面) 삼렬리(三烈里)에 우거지(牛巨池 1700,깊이11척)가 있다하고 1923년의 군지에는 작천내기(內朞)에 3차제(三次堤 3000척)가 있다하니 강진군내에서 수리시설이 가장 좋았기에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남긴 시(詩)

○ 남겨진 시의 제목은 회선정이며 김극기(金克己)와 채보문(蔡寶文)이 지었다.

 

○ 김극기의 시는 「산과 냇은 마치 꽃동산과 같고, 환상처럼 높이 솟은 누대는 귀신 솜씨 빌린 것 같다. 활짝 핀 작약은 푸른계단을 밝히고, 푸른 대나무는 둥근 살창을 가리웠다. 조각구름은 비내려 사람을 붙잡고, 소나무는 흔들거려 바람을 나그네에게 보낸다. 이런 경치에 누군들 흥겹고 아름다움 없으리요, 가정(柯亭)의 대나무로 피리 만들어 불고, 역산의 오동으로 거문고 만들어 퉁기리」라 하다.

 

○ 채보문의 시는 「말 몰아 빨리 달리고픈 여행길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 근심의 성곽을 쳐부수는 데는 술이 최고다. 바람은 물소리를 끌어와 돌 베게에 잠기고, 달이 움직이니 꽃 그림자는 둥근 창에 비춘다. 섬돌가 수 백 가지 꽃들은 봄빛을 다투고, 난간 밖 두 구루 소나무는 온종일 바람 분다. 앉은자리 여러 신선은 모두가 덕행이 훌륭하니, 노래하고 좋은 시 읊으며 거문고 퉁긴다.」라 하였다.

 

맺는말

○ 이상의 자료와 정황으로 보아서「회선정」은 1100년경에 건립되지 않았나 추정을 해본다. 그 이유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 고을을 대표하던 인물들이 고려사에 실려 있고 또 그들을 통하여 시를 짓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의 전거들을 더 찾아보려면은 김극기와 채보문이 남긴 문집을 확인하여 회선정 시가 실려 있다 면은 절대 년대도 확정을 지울 수가 있겠다. 우리 고을에 현재까지 전해오는 정자가 여럿이 있고 또 새롭게 건립하는 정자들은 많다.

 

그러나 강진 정자의 시초나 다름이 없는 회선정을 옛 터에 복원하여 관련 사실들을 상세히 적어서 걸어 두어야 겠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찾아보게 하고 그 뜻을 오는 이의 가슴에 담아가서 「강진의 회선정은 고려 때부터 있었노라」는 그 하나라도 전하게 하였으면 한다. 그래야만이 옛 어진이를 본받는 큰 뜻이 이어질 것이요 복원하고 있는 53주 6진의 본부였던 병영성도 함께 제 값을 쳐 줄 것이다.

 

또 이 회선정을 복원하고 나서 「강진의 정자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 후생의 교육 자료가 되게 하는 징검다리도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강진의 연표


1274. 호국신사(護國神社)가 세워지다.

1275. 6. 낭장 조정통(曹精通)이 바둑을 잘 두어 원나라에 가다.

1277. 4. 바둑의 명수 조윤통(曺允通)이 바둑 두러 원나라에 갔고 또 1280. 3월에 다시 바둑 두러 가다. 1306. 8. 조윤통이 도첨의한성사를 지내고 졸(卒)하다.

1278. 봄. 정오(丁午)가 용혈암(龍穴菴)에 주석하다. (1280까지)

1279. 원나라 제주도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다. 이후로 마량(馬梁)의 명칭이 생겨난 것 같다.

1284. 원나라 제주에 군민안무사(軍民安憮使)를 두어 몽고의 직할시로 삼으니 일본과 남송을 공략하기 위한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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