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 인간에의 길
[다산로에서] 인간에의 길
  • 강진신문
  • 승인 2012.09.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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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환 I 작천지역아동센터

'행복'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길어낸다. 중등 시절에 흔히 쓰던 스프링노트는 그 하나이다. 그것은 16절 크기의 갱지로 속을 채우고 겉은 연예인의 화사한 사진이나 그럴싸한 문구들로 꾸며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유치환의 시구,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그 시절의 개똥철학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억지로 읽어내야 했던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또 그 하나이다.

젊은 지성인의 이름으로 부과된 숙제이었던지라 행복은 유리상자안의 그것이었다. 그리고서 조우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에서는 시한부인생의 남녀가 펼치는"잔인한 행복"을 부러워했었다.
 
행복의 텃밭에 뿌려진 이런 씨앗들은 그것들대로 뿌리내리고 있을지언정, 삶을 일구고 가꾸는 마당에서 그 말을 곱씹어보지는 않았다. 행복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든지 일을 한다든지 라고 의문해보지 않았다.

행복하기 때문에 영화를 본다든지 산행을 한다든지 하는 물음을 띄워보지 않았다. 그래서 일상에서 늘 부딪히고 마는"행복한 강진"의 메시지는 생경하고 곤혹스럽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무엇인지도 모를 행복이라는 덫에 걸려있는 느낌이다.

배부른 돼지의 일생이나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삶이나 그들로써는 행복하였을 텐데 말이다. 얼른'행복지수'같은 것이라도 내밀어 말해본다고 해도 거기에 있는 부정적인 느낌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지금껏 지역사회는 행복하지 못했다는 말일까"라는 핀잔이나 비꼼이 그것이다. 다만, 눈치껏 강 군수의 정책적 지향점을 읽어 본다.

사람과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관계하고, 사물을 인식하고, 말들을 주고받는 생활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할까? 작은 나를 버리고 매사 큰 나를 지향하는 "큰 생각"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지역공동체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열린 마음은 열린사회를 요구받고, 큰 생각은 작은 삶으로부터 그 진정성을 의문 받는다.

달리말해 지역사회를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갖는 삶의 단위"로 삼고 사고의 지평은 현실의 구체성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구체성이란 실천 가능한 현실의 틀을 염두 하는 행위이고, 이것으로부터 당면하는 문제의 성질은 더욱 분명해질 터이다.

어떤 한 문제가 어떻게 다른 문제와 얽혀 있고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늠케 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지역사회의 곳곳에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지역사회의 지배블록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고, 그런 구조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특정 세력이 지역의 관료, 의회, 언론, 경제계 등을 장악하여 권력블록을 형성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주민의 생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결정되는가? 사람 사는 곳에 있기 마련인 갈등이나 긴장들은 어떻게, 얼마나 노출시키고 있는가? 그 해소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들은 얼마나 진지한가? 단언컨대 지역사회의 민주적 토대의 구축은 결국 칼 포퍼의 전언처럼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의견을 달리하여도 그의 길을 갈 수 있는지를 묻는 물음일 터이다.
 
한편, 큰 생각이 낳는 큰 삶을 그것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해서 당장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뒤바뀔 수 있는지 말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아짐이나 아재에게 그것은 말의 기만일 수 있다. 큰 생각은 그러므로 여기에 연결될 때에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사람다운 수준에서 먹고 살고 자식을 기르고 하는 기본적인 인간적 생존이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은 여럿 있다. 나락 값은 똥값이고 대학등록금은 금값인 데, 이 괴리와 짐은 순전 개인의 몫일까? 불볕 아래 양철집의 노인에게 안락한 주거는 헛된 욕심일까? 성장기의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양질의 급식을 제공할 수 없을까? 주민의 문화적 욕구의 해소는 강진이라는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을까?
 
행복한 강진의 정치기획이 반드시 들고남이 없는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안정한 삶터를 마련하고, 비민주적인 것들을 민주화하는 것은 그것의 책임이다. 이것 없이는 정치마당은 엘리트들의 놀이터일 뿐 인간에의 길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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