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 549세 된 강진군청터
[다산로에서] 549세 된 강진군청터
  • 강진신문
  • 승인 2012.07.2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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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 I 향토문화재연구소장

강진군은 1417년 1월 20일 날 태어나서 현 위치에 치소를 두었다. 12년 뒤인 1429년에 송계(松溪 성전 수양리)로 옮겼다가 46년째인 1475년에 다시 옮겨와 지금에 이른다. 예전 탐진현(757년)일때는 읍성의 동쪽 북문지쪽에 있었던 것 같다.
 
한자사용의 마지막인 1967년 군지의 공해(공평한 마음으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곳)편에 18채의 건물이 적혀있다.
 
공무로 온 빈과 일반 나그네인 객을 초대하던 객관, 수령이 행해야할 일곱가지 일을 다하던 선7당, 종합사무실인 금릉관, 지방관청의 안채인 내아실, 서고인 동책실과 서책실, 지역유지의 자문처인 향청, 고을의 주된 업무처인 현사청, 벼슬아치의 자제만 교육시키던 관서재, 지방의 사무실관청, 장수가 지휘하던 장대, 법률, 소송, 형옥, 노예 등을 맡던 형방청, 행정실무자 처소인 장방청, 관가의 남자일꾼 출근처인 노방청, 산·연못·물건만든이, 집을 짓거나 고친이, 도자기나 쇠붙이로 만든이를 맡은 공방청, 남쪽에 있던 남문, 서쪽에 있던 서문, 죄지은자를 가두던 형옥이다.

그 밖에 영사정, 련무정, 그리고 폐문루(통금과 해제담당)등도 있었다.
 
현재는 3백년이 넘는 노송과 1958년에 옮겨온 대여섯기의 현감비와 1기의 암행어사비가 있어 옛터를 알게 해준다. 객관은 보통학교와 세무서로 바뀌고 선7당은 현재의 군청이 되고 관서재는 개인소유이며 금서당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중앙에서 새로 발령된 수령은 부임하기전에 계자를 새긴 널빤지 앞에서 수령7사를 외우고 떠나가 그대로 근무하게 했다. 계판은 일의 주의 사항을 써서 승정원에 걸어두고 그 앞에서 임금에게 보일 서류를 처리 하던 곳이다.
 
첫째 농사짓고 누에를 잘치라는 농상성, 집과 인구를 늘리라는 호구증,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잘하라는 학교흥, 군사에 관한 정사를 잘하라는 군정수, 토지세와 의무 노역을 고르게 하라는 부역균, 하소연과 고소는 간략히 하라는 사송간 간사하고 교활한 짓은 멈추게 하라는 간활식이다.
 
다산이 지은 군청지침서인 목민심서에는 강진에 관한 여러 내용들이 첨기되었으며「나라의 길잡이 목민심서」와「강진과 목민심서」에 자세히 밝혀 두었다.
 
선정을 베푼 관리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선정비는 「돌에 덕을 칭송하여 오래도록 보여주자는 것인데 그 자신이 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라 했다. 또 나무에 새겨서 세우는 목비는 1년이 지나면 뽑아서 널빤지로 쪼개어 가장 불쌍한 이의 시체를 담는 관으로 사용하라고 일러두었다.
 
공직의 첫째는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며 이 욕에 끌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밥 한그릇, 국 한그릇,김치 한접시, 간장 한접시를 실행하여 민중을 돕는데 쓰라고 했다. 다산의 강진유배 18년동안 가장 큰 공적은 전염병으로 다 죽게되었을 때 성산자(聖散子)란 처방으로 수천사람을 살려낸 일이다.
 
강진현감 근무자 중에서는 이득준과 안병학을 본보기의 상징으로 당시의 실상을 밝혀놓았다. 근면과 검소 그리고 강진민중을 위한 일로 나라에 요청해서 강진의 500년 역사는 전라병영, 강진군청 그리고 고려때 청자국립제작청이다.

오랜된 것은 천변과 지이가 적었고 사는이가 함께 하였고 넉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진은 쾌청일수가 많고 산과 들이 이롭게 해주는 천혜의 고장이라고 밝혀 두었다. 몸과 마음이 정갈하고 예리한 식견도 갖추어졌으니 협조하고 화기애애하면 하는일마다 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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