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영렬 화백<상편>-강진이 자신의 중심이였던 '강진의 화가'
[3]김영렬 화백<상편>-강진이 자신의 중심이였던 '강진의 화가'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3.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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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암투병중..."아직 그리고픈 강진풍경이 많은데..."
▲ 김영렬화백이 금서당 화실에서 투병중인 몸을 이끌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설명하고 있다.

“암투병이 이렇게 힘든 줄 낸 들 알었것는갚

 

노 화가는 야위여 있었다. 최근 2개월 동안 몸무게가 10㎏ 이상 줄었다. 다행히 식사는 조금씩 한다고 부인 박영숙(64)씨는 귀뜸했다. 인터뷰 자체가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노 화가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림 얘기가 나오면 눈이 반짝거렸다. 누드화를 설명할 때는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한없이 눈물을 흘러내렸다.

 

몇일전 서울의 한 독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렬화백이 암에 걸렸다는데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청자문화제때면 매년 행사장에서 전시회를 열던 김화백의 모습이 올해는 보이지 않았던게 생각 났다. 많이 아프신가 보구나...

 

▲ 김화백이 부인과 함께 금서당 잔디밭은 산책하고 있다.
깨죽을 사들고 강진읍 남성리 ‘금서당(琴書堂)’으로 향했다. 한국미협회원으로 평생을 지역에서 미술가로 활동했고, 문화원 부원장까지 역임했던 원로의 투병사실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앞섰다.

 

군청앞을 지나 영랑생가 골목으로 들어서 줄 곳 올라가면 보은산 초입에 금서당이 있다. 금서당 마당에 서면 강진읍내 시가지와 구강포가 마치 손에 잡히는 듯 펼쳐진다. 양쪽으로는 금사봉과 만덕산 정상이 날개짓듯 버티고 있다. 뒤쪽에는 보은산 적송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풍수에 문외한이 봐도 명당일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강진의 유지들은 지난 1905년 이곳에 처음으로 신교육기관을 짓고 이곳을 금서당이라 명명했다. 학문을 하되 거문고 소리처럼 하라는 절묘한 뜻이라고 한다.

 

영랑 김윤식선생도 이곳에서 한학을 했다. 3.1운동 당시에는 이곳이 만세운동의 시발지였다. 금서당은 훗날 강진중앙초등학교로 맥을 이어 강진교육의 탯줄역할을 했다. 지금도 강진사람들은 이곳을 강진정신의 요체로 보고 있다.

 

이런 곳이 일제강점기에 곱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는 폐쇠되고 건물은 절반정도 쓰러뜨려 버렸다. 금서당은 6.25를 겪고 난 후까지도 폐가로 방치됐다. 이곳을 찾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20대 후반의 김영렬화백은 강진읍 남성리의 한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너무나 불쌍했어. 삯바느질 하느라 날이 세는 줄 몰랐지. 그래서 나도 바느질도 배워 어머니를 돕기도 했는데... 평생을 샛방살이만 한 어머니께 내집을 꼭 장만해 드리고 싶었어”

 

벽에 몸을 기대어 옛 기억을 되살리던 노 화백은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렸다. 팔순을 넘어서도 아들은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느날, 주변사람으로부터 3년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은 집이 있는데 한번 구경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금서당이었다. 소개한 사람과 올라가 구경한 금서당은 말그대로 폐허였다.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풀속에 숨어버린 금서당은 절반정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 집을 선물할 수 있다면 ‘산속의 굴집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벌이는 두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주변사람으로부터 초상화를 한번 그려보지 않겠느냐는 주문을 받았다. 그림에는 자신 있었던 김화백은 선뜻 응했다. 강진읍 목리에 살던 부자 노인부부로 기억하는데, 60호 크기로 초상화를 그려주자 당시 시가로 논한마지기 값을 주었다. 거금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화백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내집 마련의 꿈’을 실현했다.

 

금서당은 원래 교실용도의 건물이었다. 총 다섯칸의 한옥이었는데 일제시대때 세칸이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은 두칸이었다. 주변사람들은 집을 쓰러뜨려 버리고 새로 건물을 지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김화백은 건물 곳곳에 빼꼭히 들어차 있는 학생들의 시문을 보면서 새 건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처마밑에 낙서처럼 적혀져 있는 ‘금서당’이란 말은 전율을 느낄정도였다. 금서당이야 말로 강진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화백은 오기와 깡다구로 건물모양을 지키기로 했다. 건물한쪽을 밀가루 반죽으로 땜질을 하듯 이어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화실도 꾸몄다. 문 앞쪽으로는 작은 연못을 돌려 잉어를 넣었다. 수풀로 무성했던 마당은 잔디가 심어졌다. 이렇게 해서 금서당이 지켜져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됐다. 흔히 관서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에대해 김화백은 화를 버럭냈다. 관서재는 관에서 통제하는 학교라는 뜻으로 일본사람들이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뷰를 조금 쉬기로 했다. 김화백의 얼굴에 피곤기색이 역역했다. 김화백은 요즘 약으로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중이다. 김화백은 올 초 친지가 있는 뉴질랜드로 부인과 함께 그림여행을 떠났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2개월을 머물렀는데 갑자기 체중이 빠지기 시작했다. 현지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몸은 계속 쇠약해 졌다. 결국 귀국을 서둘렀고 국내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간암진단을 받았다.

 

“내가 성요셉 근무때 토요일이면 항상 막걸리를 마시며 선생님들과 토론을 즐겼는데 그런저런게 쌓였나봐. 그림 그리다 보면 종종 폭주도 했고...”

 

그랬다. 그는 22년(1961년~1988년) 동안 성요셉여고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중 11년이 시간강사 신분이었다. 그는 또 평생 강진의 풍경을 그렸다. ‘구강포 풍경’, ‘우두봉’, ‘병영홍교’, ‘고성암에서’, ‘가우도의 어선’, ‘월출산계류’등 강진의 구석구석이 그의 화폭속에 자리를 틀었다.

그가 그린 강진풍경만 500여점 이상이 넘는다고 한다.

 

김화백의 ‘원죄’란 작품에는 두 남녀가 알몸으로 과일을 따먹는 모습이 나온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성경의 한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 속 알몸 남녀 우측으로 멀리 바다가 보이고 작은 섬이 세개 둥둥 떠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김화백은 그림속 바다가 강진만이라고 했다. 섬은 가우도와 비라도, 죽섬이었다. 모두 강진만에 있는 섬들이다. 에덴동산이 멀리 있는게 아니고 바로 우리곁에 있다는 메시지였다.

 

이렇듯 그는 철저히 강진을 중심에 두고 예술활동을 해왔다. 

 

“아직도 그리고 싶은게 많은데... 캔버스에 담고 싶은 강진의 풍경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노화백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동학혁명 당시 해남지역 동학군 두령이었던 할아버지의 자결과 아버지의 실종, 본처의 자살과 네달 후 이어진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그는 강진의 풍경들을 화폭속에 차곡차곡 담아 넣으면서 한 평생 따라다니던 슬픔을 한올한올 풀어냈다.<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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