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길 걸을때 민중의 쉼터 고바우
[5]길 걸을때 민중의 쉼터 고바우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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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문사고전연구소장>

   1. 시작하는 글
고바우는 대구면 저두리와 사당리의 경계에 위치하며 당전마을 뒤에 있는 여계산이 서쪽으로 시원스레 달리다 바다에 잠긴 끝부분이다. 이 곳에는 국도 23호선이 산 중턱을 감싸고 지나며 칠량면 희목재부터 이곳까지 4km가 되고 행정 구역으로는 저두리 하저 마을에 해당이 된다.

바닷가의 소문난 항구로 나폴리를 손꼽는데 여기는 항구가 아니여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부터는 아픈 다리를 쉬어갔다. 행인들은 눈앞에 펼쳐진 넓다란 바다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겨울에 몰아치는 찬 바람을 따스한 햇볕으로 포근히 감싸주던 안식처로 여겼다. 도로를 넓혀 포장하고부터는 그 기능을 잃었다가 근자에는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그래서 이름난 바우, 유적들, 산골, 짓는대로, 멜덤장의 순으로 엮어보았다.

2. 고바우와 함께한 이웃들
⑴ 이름난 바우
경승지면 어디에나 이름난 바우가 자리잡고 있듯이, 이곳에도 아들바우와 삼바우가 있었다. 아들바우는 고바우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30여미터 바닷가 벼랑에 잔가지가 별로 없는 100년이 넘는 소나무가 서있고 그 근처에 있던 바우의 이름이다.

아들을 못낳는 사람들이 지나다가 이 바위에 돌을 던져서 위에 얹혀지면 소원을 들어준다하여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면서도 한번씩은 시험해보았다. 또 삼바우는 북쪽으로 200여미터 지점인 현재 주택들이 있는 앞의 바닷가에 바우 세 개가 줄지어 있어서 유래한데 도로를 넓힐 때 없애 버렸다. 이 곳은 여나므집이 예전부터 살아오다가 1977년경에 하저마을로 옮겨가고 두어집만 살았었다. 그러다가 도로가 2차선으로 확장이 되고부터 다시금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어 오늘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⑵ 유적들(바다속 청자인양)
유적으로는 동쪽 주차장 곁에 초라한 비석하나가 옛을 알려주고 있으며 바다속에는 청자가 고기잡이 할 때 인양이 되었었다. 그래서 수년간 고기잡던 사람들을 만나고 증언을 들어서 가장 확신이 가는 마량앞바다와 고바우 모퉁이로 정하였다. 그러고 나서도 기관, 해군, 전문인등과 논의하고 현지답사도 여러 차례 가져 그들의 뜻도 일치하여 추진하니 필자가 소원하던 40여년만의 일이었다.

그때는 1996년 10월2일로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렁였지만 진행하니 해군 유물 탐사선에는 특수기능을 맡은 군인과 자동화된 시설이 갖추어졌었다. 고바우의 일례를 적으면 고바우, 대계산, 가우도가 만나는 3각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촬영 한 다음 그 도면에 찍힌 상태에 따라서 물속에 잠수하여 확인하였다. 그러나 바다속이 퇴적이 너무 많아 위치확인이 어렵고 또 유구로 확인이 되었어도 뻘을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인양을 못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⑶ 산골(구리)
산골은 구리의 일종으로 사람의 뼈가 부러졌을때 맞춘 다음 갈아서 먹으면 잘 붙는다는 접골약으로 쓰이던 광물인데, 고바우는 산골이 매장되어 있다. 좀더 이해가게 설명하자면 청황색을 하고 4각형의 젓가락을 도막낸 것처럼 된모형을 하고 있다.

약으로 쓸 때는 사기접시에 산골을 놓고 물을 섞어 숟가락으로 힘주어 눌러갈면 쉽게 풀린다. 이물을 마시면 되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힘 샌 장수를 낳으려 하면은 아이 벤 어머니가 산골을 갈아서 마시면 그 아이는 장수가 되지만 어머니는 오해 살지 못한다는 전설도 있다.

⑷ 짓는대로
사람이 살아서도 잘 해야하지만 세상을 떠난이를 길지에 모시면 복을 받는다는 풍수지리설이 여기에도 있다. 북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의 도로 위쪽에다 사시(10시-11시경)경에 묘지를 썼는데 오시(12시-1시경)에 운이 틔어 복이 닥친다는 즉 발복(發福)을 했다는 일이다. 그 터는 닭이 우는터라 하고, 묘지를 쓰고나자 검은 황소가 물을 건너왔다 하고, 또 하나는 장삿배가 와서 물건을 맡겨놓고 찾으러 오지 않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등 구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⑸ 멜덤장
고바우 앞바다를 구강포라고도 부르며 숭어와 전어들이 가장 많이 살아 그것을 좋아하는 살쾡이들이 가끔 찾아와 노닐고 뻘 속에는 진질이 미역밭처럼 덮이고 그 속에는 성게, 게두, 소라, 장어, 포두새, 참고막 등이 숨어 있었다. 또 물이 들고나는 벼랑 밑 바위에는 따게비, 홍합, 고동, 굴 등이 모여 있고 안쪽에는 반지락과 고막이 날마다 채어내도 있었다. 현재의 정자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돌층계를 따라가면 넓다란 바위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이곳에서 바다속으로 200여미터에다 1967년경까지 윤재상과 박종안이 멜덤장을 시설하였었다. 그 구조는 긴 장나무를 박아 늘어세우고 맨 끝 물속에는 사각형으로 설치하되 장나무의 중간은 대나무를 쪼개어 엮은 대발을 둘러쳐서 멸치가 사각형 틀 안으로 들어가 한곳으로 모이게 한 장치이다.

3. 맺는말
옛 사람들은 10리 정도를 걸으면 잠깐 쉬었다 가는 일이 습관이었다. 여기의 고바우도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은 재미로 오가면서 바다도 보고 해질녘 노을도 구경하는 볼꺼리가 되어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럴때에 현위치와 주위의 환경을 잘가꾸고 또 지닌 의미를 알릴 수 있는 안내문을 적어 두었으면 한다. 그저 그랬으면 하는 즉흥적인 것보다는 역사성, 상징성, 차별성 등을 비교하고 논의하여 무엇인가 배워가고 즐길 수 있게 연구되어야 할 때다.

마음 같아서는 경승안내판, 놀잇배, 상구대미 해수욕장, 매월 갖는 밤 모임, 등으로 우리부터 자주 찾아 자연의 신비를 배우는 장터가 되었으면 더 좋겠다. 또 1884년쯤부터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전 강진현감 정학순(鄭學淳)의 비석도 함께 가꾸어서 입으로 전하는 역사와 함께 하고 근처의 산을 계단식으로 야외무대로 다듬어 활용할 방법을 강구하여 야간 음악회나 집회의 장소로도 이용한다면은 대낮에 흐트러진 마음을 살포시 내보이고 싶어 하는 청자의 자태마냥 아이적 마음이 되게 해주어 호연지기의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면이 허락한다면은 현재 건립되어 있는 정자의 명칭을 확고히 하여 그 정자와 관련지어 독자에게 한번 더 전하려고 이번에는 전체의 역사성만 위주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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