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해상실크로드, 경승지 돛머리
[4]해상실크로드, 경승지 돛머리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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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광식<문사고전연구소장>

1. 시작하는 글
서기 600년쯤에 물물교역차 아랍에미레이트 상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해상실크로드 돛머리는 저두산(猪頭山:347m)자락에 있다. 바닷가를 따라 국도 23호선이 나있고 칠량의 희목재부터 고바우까지의 4키로미터는 찾고 싶은 길이가 한눈에 보이는 서쪽 전체를 강진만의 구강포라 하며 대구초등학교가에도 있다. 수수백년 전부터 바다를 오갈 때 배를 대던 순수한 우리말의 항구이며, 서쪽건너 월구지에서 바라보면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감탄이 저절로 나게 하는 경승지이기도하다.

마을의 명칭은 저두산(猪頭山)에서 본따고 강진만의 구강포는 저두산의 구십동(九十洞)에서 유래했다. 또 이 곳에는 차별된 유적과 전설이 있으니 유적으로는 별공(別貢)으로 쇠붙이를 바치던 부리터 즉 야철지(冶鐵址)에 해당되는 안골밭(109)과 바재밭(137)이 있고 잡공(雜貢)으로 옻칠을 바치던 칠재소(漆材所)가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칠촌(漆村)으로도 불렀다.

다음으로 전설도 있는데 길을 새로낼 때 「히목재에서 피가 노오고」「도둑골에는 금절구통이 묻혔다」하며 명당터로는 조리, 오시발복, 삼밭재 등이 있기도 하다.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저두산, 구십동 현재의 호칭, 명당유래, 구강포의 명물황가오리, 도사공순으로 정리해본다.

2. 나룻터 돛머리
⑴저두산
저두산과 구십동은 그 이름을 잊은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 전거는 1723년부터 1885년까지 기록된「호남좌도 금릉현 천대산 여지승람」에 있다. 먼저 저두산은 계국(界局)조에 있는데「천태 회위내백호 이위저두산 이외백호(天台廻爲內白虎이爲猪頭山 爲外白虎)」라하니 설명하면 「천태봉이 감싸고 돈 곳(동쪽)은 내백호가 됐고, 내려 뻗힌곳(서쪽)은 저두산이 됐다」이다.

⑵구십동
구십동은 산천(山川)조에 있는데 「저두산 재천태지외 유구십동 봉학유수 위승관(猪頭山 在天台之外 有九十洞 峯壑幽邃 爲勝觀)」이라 하니 내용은「저두산은 천태봉우리의 바깥쪽에 있으며 구십동도 있다.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이 그윽하고도 깊숙해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즐길만한 경승지이다」는 뜻이다.

⑶현재의 호칭
현재의 호칭은 하저를 기준으로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궁시리, 가마골, 양지쪽등 안고랑(구십동), 삼밭재, 새종기, 방애골, 매물등, 삼바우, 고바우가 있다. 또 구십동에 대해서만 북에서 남으로 적으면 양지등, 땅까시바탕,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 밤나무골,대소요등, 시리봉(두류봉:頭流), 홍두깨잔등, 조리명당, 중산골, 벙구나무골, 동백나무잔등, 삼밭재가 있는데 등성이는 양지, 대소요, 홍두깨, 동백, 삼밭이고, 골짜기는 지챙이, 대소잠박, 옹지샘, 홈, 도둑을 합친 합수골, 시리봉골, 중산골이 해당된다.
다음으로 샘은 옹지, 벙구나무, 요등, 시리봉, 중산골에 있으며 집터로 추정되는 곳은 중산골 바우밑과 도둑골에 있고 논은 요등샘발치의 댓마지기, 시리봉골 서너다랭이, 중산골의 칠팔다랭이가 있으며, 벙구나무골의 시누대와 동백나무잔등 묘지의 동백나무는 조사해 볼 곳이다.

⑷명당유래
사람이 사는곳마다 길지라는 곳이 있는데 하저마을은 조리명당, 오시발복, 닭이울터 등에 있다. 첫 번째는 구십동, 두류봉 정상에 있으며 금릉8학사와 쌍효자로 알려진 창녕조씨 32세인 조몽린의 묘소며, 두 번째는 삼바우 길위에 있는 진주강씨 묘소며, 세 번째는 삼밭재에 투묘했다 파냈던 곳이 해당된다.

⑸구강포의 명물황가오리
하저의 고기잡이 역사는 아주 오래 됐지만 시작은 알수가 없다. 옛 방법을 적으면 돌을 쌓아 잡던 독살, 대발로 막아 잡던 덤장, 그물을 둘러친 게메기 등이 있다. 독살터가 남아있으며 예전에는 다섯곳이고, 덤장터는 삼바우둘, 모래등 둘, 횟집앞 하나이다. 수면에는 항상 상쾡이(돌고래)떼가 떠다니고 뻘에는 반지락, 새꼬막, 참꼬막, 꼬막, 비틀이, 멩기고동, 소랑고동, 뻘떡기, 하랑기, 설키가 나고 물속은 오징어, 줄치, 넙치, 황가오리, 세대, 장대, 농어, 광어, 돔, 쎄미, 한새치, 미금장어, 중하, 대하 등이 잡혔다.

⑹도사공(都沙工)
배를 부리는 일을 업으로 삼던 사람중에 으뜸을 말하며 하저와 월구지 사이에 1975년까지 운영하던 나룻배와 관계된다. 왕조실록1448년 8월 27일의 기록에 「연해주현의 여러섬과 곶(串)의 소나무가 잘자라는 땅을 찾아가 기록하라」는 내용에 강진은 월이곶(串), 좌곡곶, 산달도, 완도, 고시도, 선달도가 있으니 구십동과 월이곶의 나루는 이 무렵부터 시작이됐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폐지 할 때는 이재수와 곽상철이 운항했고 배는 노를 젓던 돛단배였다. 그럴때에는 주막이 하저에 두 군데 월구지에 한군데 있어 바닷길을 건너가고 오는 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여 세상의 물정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3. 맺는말
십리나 되는 해안선에 위치한 수백년 된 하저 마을은 사람살이 중에서도 특별한 연유가 있어서 항구의 기능을 맡아 현재까지 이어온 것 같다. 그러나 고기잡이 시대에는 찾아오는 방문객에 의해서 삶에 도움이 되다가 그들의 발길이 줄어들고부터는 경작할 농토가 부족하여 궁핍하게 살게 된 적도 있다.

그랬지만 하늘이 선물한 산은 훼손하지 않고 옛 그대로 간직해오며 앞바다인 구십포에  얻은 김과 반지락 등을 판매하고부터서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또 하저마을을 지나는 국도 23호선은 고려청자와 마량의 낚시를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통로이다.

이제는 돛머리에다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로 황포돛배를 한척쯤 복원하고, 둘째 옛 주막집도 담쌓고 이엉 덮어 복원하며, 셋째는 강진의 어촌 체험장으로 가꾸며, 넷째는 구강포를 어족자원화하고, 다섯째는 긴 시간을 두고 온 나라에 알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과 관련자가 머리를 맞대고 실행 가능한 일을 정하고 차근차근 실천을 하면 휙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꼭 들렀다 가는 곳으로 입소문도 나게 되어 등산, 낚시, 풍어제, 어촌체험 등의 어느 한 가지는 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와 유적이 있고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자연조건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주민이 앞장서서 터전을 제공하고 풍광을 사랑할 줄 아는 이면 누구든 품어서 그들이 꿈을 펴도록 함께 가꾸어야 할 때이다. 그럴날이 하루바삐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꿰맞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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