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고]만덕산 백련사
[투 고]만덕산 백련사
  • 강진신문
  • 승인 2011.08.19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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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남 I 광주지방조달청장

강진의 명소는 어디든 좋지만 필자는 특히 백련사에 정감이 간다. 선산이 인근에 있어 명절엔 가족들과 성묘 후 자주 들렸고 방학 때면 곧잘 백련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학졸업을 앞둔 방학 땐가 보다. 스님 한분이 팔만대장경 1독이 삼국지 10독보다 낫다는 말에 한 달 내내 밤 새워 읽었는가 하면 밤엔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 벌벌 떨었던 기억도 있다.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839년)때 창건됐다. 천년이 훨씬 넘는 고찰로, 사찰을 품은 만덕산 모습이 활짝 핀 연꽃을 닮았다하여 백련사라 불리게 됐다한다. 이곳은 고려 고종19년 원묘국사 요세가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본거지이기도 하다.
 
백련결사란 고려후기에 정치와 종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스님들이 염불수행을 통해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일종의 불교정화운동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백련사는 고려시대에 8국사를, 조선시대엔 8종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불교사에도 걸출한 업적을 남긴 사찰이다.
 
백련사는 만덕산 전차(錢茶)로도 유명하다. 엽전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전차는 최고의 차로 인정받아 궁중에 진상되었다한다.

그 제다법은 상당히 까다로워 참선의 경지 이상으로 어려운 고행의 길이었다고 하니 그 차 맛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예부터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렀는데 정약용의 호, 다산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백련사는 강진의 역사문화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강진 답사 1번지를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의 일화가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련사와 머지않은 초당에서 기거하던 다산은 운명적으로 혜장선사와 조우하게 된다. 유교와 불교계의 당대 최고 석학이 만나 서로 학문의 깊이를 더하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교제가 어디 있겠는가?
 
백련사는 명승고찰 자체도 유명하지만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산책로 또한 일품이다.
 
선산이 산책로 중간쯤 있어 자주 찾지만 언제 걸어도 새롭고 산뜻하다. 수백 년 전, 다산이 혜장을 만나러 다닌 길,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다산과 혜장의 우정의 길, 믿음과 존경이 담긴 이 길이 요즘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걷는 데이트코스로 각광받고 있다한다.
 
선산이 있는 해월루에서 백련사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수령이 300여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붉게 핀 동백 숲과 강진만의 푸른 바다, 천년세월을 품은 사찰이 어우러져 비할 데 없는 절경을 빚어낸다. 다산과 혜장이 담소를 즐기고 우정을 쌓는 모습을 떠올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절 입구에 들어선다.
 
경내에 들어서니 동백나무, 비자나무, 푸조나무의 풋풋함과 싱그러운 내음에 코끝이 몹시 향기롭다. 필자가 찾은 한식일엔 대웅전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어수선한 공사 때문에 경내를 자세히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옛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중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다만, 필자가 예전에 머물렀던 숙소 앞의 개울은 흔적도 없어지고 가기 무서웠던 화장실은 터만 남아 있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절 주변을 둘러보다 그냥 떠나기가 서운해 만덕산 영천수로 목을 축인 후 경내 찻집에 들렀다. 주지스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차 맛이 일품이었다.

아내와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발길을 돌리는데 백련사의 범종소리가 은은하게 경내에 울려 퍼진다.
 
힘없고 나약한 중생들을 위한 백련결사가 이곳 강진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수많은 명승들을 배출한 사찰이 고향땅에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오늘따라 백련사스님들의 기도가 저 종소리에 닿아 더욱 애절하게 가슴속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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