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양반댁의 모습이 살아있는 마을
정갈한 양반댁의 모습이 살아있는 마을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1.05.18 0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량면 원포마을

원포마을 회관의 모습이다.
봉대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원포마을은 예부터 자연경관이 수려해 선비들이 머물면서 안빈낙도의 삶을 그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자연을 벗 삼아 가사문학 꽃피우기도

봄날은 봄날이다. 온갖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며 온 세상을 뒤덮은 지 오래다. 붉은 꽃은 더욱 붉어지고 노란 꽃도 샛노란 색으로 세상을 뒤덮으랴 정신없다.

백색의 아름다움으로 상춘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왕벚나무는 어느덧 하얀 봄눈을 뿌려대며 황홀함까지 더한다. 탁 트인 벌판으로 청보리밭의 초록물결이 넘실대니 산과 들에 봄내음이 한 가득이다.

햇살이 부서져 은빛으로 출렁이는 강진만의 물결이 눈부시게 펼쳐진 가운데 찾아 간 곳은 마량면 원포리 원포마을.

우리 선조의 단아한 생활상과 양반의 기풍이 지금도 남아있는 원포마을에서 주민들의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본다.

원포마을은 마을 뒤편으로 봉대산이 병풍처럼 가리고 있고 앞으로 들녘이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바다와 근접한 곳에 위치해 있으나 바다를 통해 소득을 올리지는 않는다.

현재 원포마을에는 33가구 70여 명의 주민들이 대부분 벼농사에 의존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한학자들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곳곳에는 옛 서당터가 즐비해있고 강 선생님집, 조 선생님집, 김 선생님집 등은 아직까지 전해져오는 마을지명이다.

그만큼 주민들은 학문에 관심이 높았고 한학자가 많아 멀리서도 마을까지 글공부를 배우러 왔을 정도였다.

마을은 자연경관이 수려해 묵객들이 머물면서 시조를 주고받았던 야외학당으로 유명하며 주민들의 인심이 좋아 예부터 선비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의 삶을 그린 가사문학을 꽃피운 곳이 바로 원포마을이었던 셈이다.

이렇다보니 마을주민들은 예법이나 풍속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주민 김연심(여·80)씨는 "원포마을은 양반촌이라 예법이 엄격해 1950년대까지도 마을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여자는 비녀를 꽂은 채 돌아다녔다"며 "이 시기에는 여자들이 왜바지(일명 몸빼바지)를 입고 일을 하는 것을 금했었고 파마 또한 할 수도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원포마을에서 부녀자들이 왜바지를 입고 파마를 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차츰 가능했다.

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봄나물을 손질하고 있다.
그 정도로 수 년 동안 부녀자의 수절과 예법, 풍속을 엄하게 지켜왔던 곳이 원포마을이었다.
 
원포마을은 고려시대 남양홍씨가 처음 설촌했다는 구전과 지난 1659년 안산김씨가 이주해와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을 뿐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예부터 양반마을로 불리며 유교문화가 널리 성행했고 어진 선비들이 사는 마을로 알려지며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 수많은 효부들이 많았던 것도 유교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에서다.

마을에는 주민 윤신남, 백상금, 박말례, 김재권, 박현단씨 등 수많은 주민들이 강진향교와 강진군수 등으로부터 효부상을 수상키도 했다.

그래서 원포마을은 소문난 인재가 많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곳이기도 하다. 마을은 어쩌면 그 때와 크게 변하진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포마을 회관의 모습이다.
수백 수 천 년을 지나오며 사람은 변했지만 미덕과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가옥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보니 더욱 친밀하다.

그 바탕에는 각자 인생의 전성기와 황혼기를 함께 동고동락했다는 연대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래서 순후한 인심을 바탕으로 주민들 간 단합이 잘되고 경로효친 정신이 투철한 마을이라는 평이 자자한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주민들은 서로를 부를 때 00댁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나이가 많은 주민이 나이어린 새댁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이다. 윗사람이라고 해서 말을 쉽게 낮추는 경우는 없다.

마을 제사 시 서로 청하고 정초에는 세배를 빠짐없이 나누기도 하는 등 서로 돕는 정신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어 범죄 없는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원포마을을 감싸고 있는 봉대산은 과거 봉수대가 위치해 있었다. 봉수대는 산 정상에서 불을 피워 연기로 외적의 침입 등을 알리는 봉화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과거 봉화가 피어올라 이름 붙여졌다는 봉대산을 뒤로한 채 자리 잡고 있는 원포마을에 이제는 행복과 희망이라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길 기대해 본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대구면 부면장을 역임한 김명호씨, 전남도청과장을 역임한 김중호씨, 안산시 동장을 역임한 조임근씨, 법학박사 출신으로 호남대 교무과장을 지낸 김영옥씨, 변호사로 활동 중인 김태윤씨 등이 있다. 

인터뷰 - 마을주민 강납심 씨 "노인공경 효심 큰 자랑거리"

마을뒤편으로 늘어서 있는 농로를 따라 발길을 옮기던 중 텃밭을 갈구고 있던 강납심(64)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강씨는 본격적인 콩 재배를 앞두고 밭에 솟아난 잡풀을 뽑기 위해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밭 면적만도 1983㎡(600여평)에 이르고 있어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었다.
 
지난해부터 콩 재배를 해오고 있다는 강씨는 "지난해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작황이 안좋아 맘 고생이 심했다"며 "올해는 땅을 새로 갈구고 잡풀도 손수 제거하며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고 밝혔다.
 
이어 강씨는 "유자나무를 심어보고 감나무도 심어봤는데 매번 큰 소득은 올리지 못했고 재작년에는 깨를 심었는데 이 또한 변변치 못해 아쉽다"며 "올해는 콩 수확이 풍년을 이뤄 주민들과 나눔의 기쁨을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을에 대해 강씨는 "주민들은 어려울수록 화합하는 전통에 따라 모두가 한 가족 같은 우애를 최고 덕목으로 하며 마을 노인들을 공경하는 효심도 큰 자랑거리이다"며 "갈수록 주민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서로 도우며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