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내가 겪은 5.18 광주 민주화항쟁
[다산로에서]내가 겪은 5.18 광주 민주화항쟁
  • 강진신문
  • 승인 2011.05.1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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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귀농인·수필가>

정확히는 모르나 광주에서 시민이 궐기하고 진압군 인 공수부대가 시내에 들어와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아댄다던 그날, 나는 강진 마량에서 직장 동료였던 형과 술을 마셨다.

라디오나 TV는 국영이건 민영이건 광주의 그것을 사태라 하고, 이북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이 획책한 책동이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정권야욕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의 음모에 광주시민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을. 그래서 그 전날 저녁 내 일기에 시(詩)라고도 할 수 없는 단문 한 토막을 그적 거렸었다.
 
광주여!  슬픈 무등이여!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정의를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은 항상 불의에 맞서 싸우고 정의로워야 한다. 그리고 또 국가는 국민이 주인이여야 하며 독재는 어떤 형태로라도 안 된다. 그래서 민주는 정의이며 독재는 불의다.

그런데 군은 불의를 꾀하고 있다. 호랑이와 그를 추종하는 이리 몇 마리가 평화를 갈망하는 소와 말과 양들을 힘으로 다스리려고 획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나는 그날 광주에 있는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온다는데 마량에서 버스에 올랐다. 광주를 가려고.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 이였던지 아니면 함께 술을 마셨던 재정형의 완력에 의해서였던지 면소재지가 있는 집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이끌려 내렸다.

그때 쉴새없이 내 머리를 휘젓는 것은 '무고한 광주시민은 다 죽어 가는데 나는 비겁하게 이렇게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대구단위농협건물 옆의 자주 들리는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뒷마당에서 몇 사람이 윷을 놀고 있었다. 그들이 방관자들인지 광주의 진실이나 어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인지는 모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이 짐승만도 못한 자식들아!" 라고. 그리고 덕석(윷판)을 걷어차며 처마 밑에 쌓아둔 장작개비 하나를 들어 사정없이 휘둘러 댔다. 그들은 피해버렸다. (뒤에 들은 얘기인데 그때 내 눈엔 핏발이 서 있더란다.)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앞 농로 길을 가는데 안면이 있는 중학교 선생이 아이를 업은 부인과 쌀자루 하나를 들쳐 메고 걸어갔다.
 
괜히 속이 끓어 올랐다. "그래, 먹고는 살아야지. 이 나라의 민주가 죽어가고, 정의는 짓밟혀도 내 알바 아니지. 광주시민이 다 죽어가도 나는 먹고 배딱지 불리고 살아야지 …" 넋두리처럼 이죽거려도 그들은 그냥 묵묵부답 걸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학교에서는, '면사무소 직원인데 정신이 조금 이상해져 있었다' 는 소문이 돌았단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몸을 흔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형님이 와 계셨다. 열 한살 차이로 항상 조심스러운 형이다. 뒤에 안 일이었는데 집사람이 내 정신이 조금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전화를 해서 7km가 넘는 밤길을 경운기를 몰고 오신 것이다.
 
그렇잖아도 몇 일 전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장질이 밤으로 걸어서 내려왔다기에 '이 놈아! 왜 도망쳐 내려왔어' 라고 했었다.
 
날짜를 잡아 큰 굿을 한번 해야겠다고 하시며 형님은 가셨다. 아마 지금 같으면 정신병원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그렇게 나의 80년 5월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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