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봉과 금사봉이 감싸안은 서당골
용두봉과 금사봉이 감싸안은 서당골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5.20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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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면 왕마마을

▲ 금사봉과 용두봉이 가옥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현재 8농가 2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왕마마을은 중 산간 지대라는 지형적인 여건으로 농경지가 부족한 편이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신들의 자택 마당을 최대한 활용해 밭작물을 일궈가고 있다.
늦봄에 접어든 이즈음 초목은 푸르름을 더해가고 산야를 수놓는 들꽃들의 자태는 더욱 강렬하다. 봄의 끝자락에 쏟아지는 한낮의 폭염은 새삼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

들녘 곳곳에 펼쳐진 보리밭이 황금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찾은 곳은 군동면 왕마마을. 군동면 삼신사거리에서 군동면 소재지로 향하는 국도 14호선을 따라 3㎞를 달리다 보면 우측방면으로 관덕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관덕마을을 지나 1.7㎞를 더 달리다 보면 금사저수지를 지나 용두봉과 금사봉이 가옥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왕마마을을 볼 수 있다. 

왕마마을은 지난 1914년 월봉마을과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하평현리(현 덕마리), 금산리, 월산리와 함께 군동면 금산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왕마마을은 월봉마을에 행정구역이 속하면서 월봉마을 왕마로 불리었다.
 
이후 1930년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왕마와 월봉은 다시 분리되었으나 1970년에 또다시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통폐합의 가장 큰 원인은 인구 감소에 따른 것으로 왕마와 월봉 마을의 가구 수는 해방 직 후인 1945년에 월봉 40호, 왕마 15호이었던 것이 1970년에 이르러 공업화·도시화·현대화 등의 이유로 이농현상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전체인구의 65% 이상이 감소하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행정편제는 월봉이 금산리 3구가 되고 왕마는 4구가 되면서 지난 2009년까지 이어졌다.
 

▲ 왕마마을에 들어서면 강진의 거부로 통했던 차종채씨가 조상들을 위해 만든 연안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난1936년 금사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왕마와 월봉을 연결하는 500여m에 이르는 길이 수몰되었고 금사마을 쪽에서 관덕마을로 3㎞ 남짓 돌아서 가야하는 불편함이 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 간 행정업무에 불편함이 많았고 단합과 친목을 이루기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지난해 1월 왕마마을은 월봉마을과 다시 분리되면서 하나의 마을로 행정편제를 이루었다.
마을의 형국이 말 형국을 띄고 있어 왕마로 불리고 있는 왕마마을은 마씨가 이곳에 살면 부자가 되고 득세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현재 마을에는 8농가 20여명의 주민들이 벼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다. 군동면소재지에서는 가장 작은 규모의 마을인 셈이다. 이중 농사를 지으며 소득원을 마련하고 있는 농가는 단 3농가로 이는 마을주민 대부분이 70~80대의 연령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금사저수지와 금산원의 모습이다. 강진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산원은 1842년에 창건한 언양김씨 원사로 감성제라 하고 위열 김취려를 주벽으로 김자수와 김성진을 배향 삼위를 모시고 있다. 금산원 앞으로 펼쳐져 있는 금사저수지는 지난 1936년 축조된 것으로 금사봉과 용두봉 골짜기를 따라 흘러 내려오는 물이 마을 앞 하천을 거쳐 금사저수지로 모여든다고 한다.

마을에 도착해 마을회관을 찾았으나 회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졸한 길목을 따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만이 마을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길목을 따라 발길을 옮기자 낮은 담벼락 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주택 안으로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 마을주민들이 김성님할머니 집에 모여 앉아 쑥떡을 나눠먹으며 환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주민 김성님(88)할머니가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마을 최고령자인 김 할머니는 "예부터 마을주민들은 자식들에 대한 학구열이 대단했다"며 "미맥 위주로 넉넉하지 못한 삶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어 항상 자식들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왕마마을은 면소재지에서도 5㎞정도 떨어져 있는 열악한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의사, 교수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마을주민들은 그 이유를 1900년대부터 마을에 자리하고 있던 교육기관을 꼽았다.

1900년대 주민들의 사랑방을 서당으로 이용해 마을주민이었던 윤재규와 김복룡씨가 훈장을 맡아 마을주민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위주로 예절교육을 실시했다. 또 1950년대 이후에는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 내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도 실시하는 등 마을에 자리 잡은 교육환경들이 인재육성에 밑바탕이 됐다.
 
이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던 박영석(75)이장이 말문을 이어나갔다. 박 이장은"오랜 기간 월봉마을에 속해있다 마을이 분리되다보니 마을회관도 없는 실정이고 농지정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왕마마을은 10여년 전에 비해 많은 것이 변했다. 매년 끊이지 않았던 아기울음소리는 끊어진지 오래됐고 반면 부음소식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것. 급격하게 노령화되는 농촌마을의 가슴 아픈 현실에 마음 한켠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이러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추, 감자 등 밭작물 재배확대와 하우스재배시설 등을 마련해가며 새로운 소득마련에 힘을 쏟고 있었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대곡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장윤한씨, 전남대교수를 역임한 마성열씨, 순천아동병원 원장을 맡고 있는 마태열씨, 미국 보스턴, 뉴욕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장인채씨, 마량에서 현대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장정희씨 등이 있다.

인터뷰 - 윤정자 부녀회장
"욕심없이 소박한 정겨운 마을 "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난 2000년도에 남편과 함께 왕마마을로 이사 왔다는 윤정자(67)부녀회장. 올해로 6년째 마을부녀회장을 맡은 윤 회장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소문난 일꾼이다.
 
마을에 대해 윤 회장은 "바람이 숲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와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 산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려 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겁다"며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왕마마을이다"고 말했다.
 
330㎡(100여 평) 남짓한 텃밭에 깨, 검은콩, 들깨를 심어 키우는 윤 회장은 "소득을 위한 재배가 아닌 우리 가족들이 먹고 이웃과 나누기 위한 밭작물이다"며 "지난해에는 역병으로 고추농사를 망쳐 아쉬움이 컸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윤 회장은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나눔의 정과 이웃의 정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임을 안다"며 "우리 마을은 대규모마을도 아니고 부촌도 아니지만 주민들의 인심만큼은 늘 풍족함을 자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해 윤 회장은 "주민들의 실생활과 마을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을 이끌어 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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