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판 사이로 금강천이 휘돌아 나가고
넓은 들판 사이로 금강천이 휘돌아 나가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3.19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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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천면 하남마을 -

▲ 본래 하남이라는 지명은 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500여m 떨어져 위치한 작은 토골만을 일컫는 지명이었다. 당시 하남으로 불리던 작은 토골은 현재 10여가구가 속해 있다.
마을앞은 조선시대 배가 정박했던 곳... 지금은 경지정리로 모두 사라져

다가오는 봄의 길목을 시샘하듯 강풍을 동반한 꽃샘추위가 기세를  부리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봄비에 겨울 내 잔뜩 웅크려있던 만물은 생기를 머금어가고 있지만 길을 나서는 주민들의 표정엔 다소 짜증스런 모습이 가득해 보인다.

봄이 오는 길목을 따라 길을 나선 가운데 찾아간곳은 작천면 하남마을.
작천면소재지에서 병영방면으로 지방도 814호선을 타고 야흥리를 지나 0.5㎞를 달리다보면 우측으로 군동 방면으로 향하는 군도5호선을 볼 수 있다.

도로를 따라 500여m를 더 달리다보면 도로의 우측으로 가옥들이 형성되어 있는 하남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농경지 사이로 흐르는 탐진강 지류의 금강천은 마을의 서에서 동쪽을 거쳐 장흥방면으로 흐르고 있다. 특히 마을 앞을 흐르는 금강천은 조선 초기 배가 정박하는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경지정리로 인해 옛 선창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하남마을은 본래 남산과 하남으로 나뉘었던 지역으로 하남이라는 지명은 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작은 토골만을 가리켰다. 하지만 지난 1960년대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인근 남산과 합쳐 하남마을로 지명을 통일했다. 이 때문에 현재 하남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작은 토골과 성주골, 남산 등 4개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인동장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후 진주강씨, 조계정씨, 김해김씨 등이 이거해 오면서 현재 마을에는 18가구에 3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12농가만이 미맥위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하남마을은 지난 1990년대까지 50여가구에 16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정도로 대규모 마을이었으나 이농현상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불과 10여년 만에 인구가 1/5로 줄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미맥으로 인한 소득이외에 특별한 소득원이 없다는 점과 마을이 북향인  지형적 영향으로 타 마을에 비해 기온이 낮아 작물재배에 대한 어려움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하남으로 시집오려면 혼수로 속옷을 하나 더 마련해야 된다'는 얘기는 하남마을이 타 마을에 비해 겨울추위가 심하다는 것을 여실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이 고둥껍질을 이용해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마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자 마을회관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회관에는 박인택(67)마을이장이 주민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마을에 대해 박 이장은 "현재에 이르러 마을에 대한 특별한 자랑거리나 내세울 만한 특수작물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을소득 창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친환경농법을 집중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고 특히 올해는 5㏊면적에 밀 재배를 실시하면서 새로운 소득창출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은 지난 1970년대 이후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 전면으로 40여㏊에 이르는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더불어 경지사이로는 금강천이 흐르고 있어 경작에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예부터 마을 주민들은 주로 쌀과 보리재배 만을 중점적으로 실시해왔다.

▲ 200여년 된 정자나무 옆에 위치한 우산각은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기와지붕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이에 마을주민들 사이에서는 무농약과 유기농을 실시한 친환경농법만이 농업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다는 의견이 점차 확산되면서 최적의 환경여건을 바탕으로 친환경농법을 육성해 나가자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또 지난 2009년부터 박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주민 6명이 밀 작목반을 구성해 본격적인 밀 재배에 나서고 있다. 이를 계기로 마을 주민들은 성전면과 더불어 관내 최대의 밀 재배 단지로 성장해 새로운 소득기반을 갖춘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하남마을에는 1920년대까지 서당이 운영되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서당에는 마을주민들 이외에도 병영과 군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가끔 모습을 비추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타 마을에 비해 서당이 활발히 운영되었고 학문을 꾸준히 연마해온 주민들은 시관(채점자)이 되어 우수한 작품을 선정해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힘겨운 농사에 매달려 고단한 삶을 살아온 이들. 자신들의 모습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깊게 패인 주름살 속에 환한 미소를 내보이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부모의 마음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 박 이장이 밀작목반이 재배하고 있는 밀단지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주식회사 태영 이사장을 역임한 최병남씨, 사법고시 합격 후 변호사로 활동 중인 최병모씨, 창원 등지에서 중학교교사로 있는 장승욱씨, 인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장인수씨,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인 장근수씨, 광주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장기호씨 등이 있다.

 

 

 

 

 인터뷰 │ 주민 장춘우씨

"주민들 자식교육열 대단"

마을안길을 따라 길을 걷다가 마당에 심어진 감나무를 손질하고 있던 주민 장춘우(69)씨를 만났다. 장씨는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장씨는 "70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참 많은 것이 변하고 또 많은 것이 사라진 것 같다"며 "하지만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고향의 참 모습을 간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마을주민들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2남1녀를 두고 있는 장씨는 "미맥농사 이외에 별다른 수입원이 없어 부유한 마을은 아니었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며 "서울 구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큰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 역시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했다.

또 장씨는 "관공서에 다니거나 교사로 근무하는 마을출신들이 많은 것도 마을주민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마을에 대해 장씨는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정이 넘쳐나는 곳이 하남마을의 모습이다"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정겹게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주민들의 모습이 늘 한결 같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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