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정약용과 최익한 그리고 여유당전서
[다산로에서]정약용과 최익한 그리고 여유당전서
  • 강진신문
  • 승인 2010.01.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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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만<성화대 교수·한국사>
온 산하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더니 어느새 또 많은 겨울비가 내려 세상의 평온을 되찾게 하는 자연의 마법에 감탄을 해야할 지 질투를 해야할 지 망설여진다.
 
그리고 다시금 인간의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근대사회를 전후한 자연과 인간의 함수관계 내지 포함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품었던 여러 계획과 목표에 맞춰 일이 잘 진행되는지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을 만큼 세월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
 
올해에는 무언가 새로운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끝에 예전에 구입한 책 가운데 눈에 띄는 내용이 있어 찬찬히 살펴보니 그동안 무심코 지났던 얼마 간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주지하듯이, 우리 지역 강진에 유배를 왔던 다산 정약용은 묵묵히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그야말로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평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한 내용을 하나로 묶은 책이 저 유명한 여유당전서인데, 우리가 그 책 제목에 대해서는 학창시절에 수없이 들어보았지만, 실제 그 목차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는 생소하기도 할 뿐더러 그로 인한 거리감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에 구입했던 책을 살펴보면, 다산 서거 150주년 특집호로 꾸몄으며 자료편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함'이라는 최익한(1897)의 글을 게재하고 있다.
 
그 게재된 내용은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그 양의 다소에는 차이가 있지만, 65회에 걸쳐 지상중계를 하고 있는데, 이 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여유당전서 전반을 아우르는 독파(?) 실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독파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목차를 몇 가지 소개하면 다산 명호라든지, 선생의 천품재덕, 학문의 연원 경로, 당쟁과 척사의 표리적 관계, 내외의 모순과 서학의 좌우파, 정조 복수와 서학파의 공동전선, 음양·오행·귀신, 사회· 정치철학의 기조 그리고 다산사상에 대한 개평(槪評) 등의 다양한 접근은 자못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와 연관된 내용에 의하면, 최익한은 연재한 글에서 다산의 학문적 유산을 철저히 탐구하여 그의 진보적 측면과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밝혀내며, 기존 칭송 일변도의 연구 태도와는 경향을 달리하였다는 견해는 참고가 된다.
 
이러한 경향성은 그가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학문과 근대학문을 두루 접하고 국학 고전의 근대적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근대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뇌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최익한은 1948년 월북한 관계로 그와 관련된 글이나 업적을 한동안 우리가 접할 수 없었다가 근래 남북관계가 화해 무드로 완화되면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 "실학파와 정다산"(1956년 간행) 등이 재발간되면서 그 면모의 일부나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문에 연재된 그 내용을 보면 쉽게 읽을 수 없는 당시의 표기법과 많은 부분이 한자투성이(?)인지라 요즘 세대에겐 접근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올 한해는 이 자료를 다시 풀고 또 새로이 번역하고, 정리하면서 다산에 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싶다. 벌써 1월도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을 점검해본다. 그리고 과제로 정한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다시 보면서, 다산의 진면목을 보다 빨리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도록 오늘부터 다잡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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