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저기로 다리를 건너가네
여기서 저기로 다리를 건너가네
  • 장정안 기자
  • 승인 2009.08.24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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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여행-강진의 다리

전국 어디를 가도 심심치 않게 발견 할 수 있는게 다리(橋)이다. 예전의 다리의 역할은 수송 혹은 통행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나 요즘은 기본적인 다리의 목적 외에 관광 상품이라는 부수적인 목적이 따라붙는다.

일본의 레인보우브리지가 그렇고 미국의 선샤인스카이웨이브리지가 이동수단 외에도 관광용으로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다리이다.

강진에는 레인보우브리지나 선샤인스카이웨이브리지 만큼 관광상품화 될 만한 다리는 없지만 역사를 오랫동안 간직한 다리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다리 중 4곳을 찾아가봤다.

 


5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남포다리
남포다리는 말 그대로 강진읍 남포마을 서쪽에 위치한 다리를 말한다. 남포다리는 1956년에 지어진 것으로 약 50여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통행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남포다리가 오래됨에 따라 지난 2002년에 길이 90m에 폭은 8m의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 현재 남포에는 2개의 다리가 존재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남포다리가 생기기 전인 일제시대에는 나무다리가 있었고 이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남포마을 바로 앞까지 고깃배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통행수단보다는 하천이 수로로서 더욱 필요했던 것으로 예상된다.

세월의 흐름으로 다리의 모습은 많이 노후화되었지만 남포다리는 아직 마을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때로는 농로로 이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 주민들의 통행로이기도 하다.

또 다리 밑으로는 드넓게 자연 갈대밭이 조성되어 있어 가족과 함께 해안둑을 거닐며 갈대밭이 펼쳐진 강진만의 경치를 감상해도 좋을 듯 하다.


2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병영홍교
병영은 예부터 군사요충지로 상업이 발달 한 곳이다. 병영의 보부상들은 개성상인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상권을 쥐락펴락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때 병영상인들이나 병영성의 군사들이 이용한 곳이 병영홍교이다. 홍교의 어원은 다리의 모양이 마치 무지개와 비슷한 반달형으로 되어 있어 무지개다리 즉, 홍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내판에 적혀진 홍교의 규모는 높이 4.5m, 너비 3.08m, 길이 6.75m이며 모두 화강암으로 쌓아 만든 돌다리이다. 현대시대의 건축기술로 보면 그다지 큰 규모의 다리는 아니지만 만들어진 시기가 조선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규모에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홍교주위에는 민물낚시를 즐길 수 있는 자그마한 호수와 2층 높이의 정자 등이 있어 가족과 함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다. 현대적인 미는 없지만 자연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홍교도 한번 찾아봄직하다.


은어의 고장으로 인도하는 석교교
강진의 다리 중 석교교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의 석교교는 지난 82년에 지어진 것으로 총 길이가 240m에 높이는 6m, 폭은 7m이고 군동면 소재지와 석교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량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는 석교가 있던 자리는 배가 다니던 곳으로 별도의 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항상 탐진강을 맨발로 가로질러 다녔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큼지막한 돌을 징검다리 형식으로 놓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자동차가 다닐만한 나지막한 다리를 가설하였는데 그 다리의 높이가 너무 낮아 적은 비에도 다리가 침수되었고 1972년에는 장의차량이 전복되는 사건도 발생하는 등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 이에 마을주민들의 건의로 새롭게 지어진 것이 지금의 석교교이다.

석교교는 매년 8월이되면 활용도가 더욱 높아진다. 군동청년회에서 매년 석교교 아래 탐진강변에서 은어축제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비록 모양은 보잘 것 없지만 석교교는 은어가 살아 숨쉬는 탐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여름에 꼭 찾아봄직한 장소이다.


신전면과 해남 교류의 시작 배다리교
배다리교의 정확한 행정적 위치는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이다. 하지만 배다리교에서 50m정도만 더 오면 바로 강진의 신전면 영관리에 접어든다. 한마디로 배다리교가 강진과 해남을 이어주는 경계지점인 것이다. 배다리교의 어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따로 다리가 없는 탓에 하천(河川)을 건너기 위해 주민들이 배를 엮어 다리로 이용했기 때문에 배다리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배다리교는 지난 83년에 24m길이에 8m의 교폭 규모로 지어졌다. 예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1980년대에는 도암면과 신전면에서 장이 들어설 때에는 신월리 마을주민들이 배다리교를 통해 도암·신전으로 왔고 북일면 좌일장이 들어설 때면 신전면 주민들이 배다리교를 통해 좌일로 향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5일시장의 쇠퇴와 함께 이같은 교류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다리를 통행하는 차량의 수가 대략적으로 하루평균 400~500대가 지나는 등 예나 지금이나 배다리교는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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