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사육신 박팽년의 후손
[다산로에서]사육신 박팽년의 후손
  • 강진신문
  • 승인 2009.05.14 09: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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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강진문화재연구소장>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가 죽음을 당한 여섯 충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은 3형제를 두었는데 헌과 선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막내인 분(奮 1455~?)은 유모가 두 살 때인 1456년에 업고 강진의 칠량으로 피난와서 살면서 이름을 광헌으로 고쳤으며 증손자까지 이어왔고 그는 순천 박씨이다.

후손은 밀양 박씨로 살아 오다가 1995년 2월부터 본적 되찾기를 시작하여 2007년 2월 15일에야 순천박씨로 쓰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 일은 1957년 5월 대전 박씨 종친회에서 간행한 족보에 등제된 것을 확인한 사실부터 50년이나 걸렸다.

강진에 와서 살게된 박분의 후손은 장흥군 용산과 대덕에서 살아오며 후손 박완식의 제보에 의해 강진에서 살게된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94년 1월24일날 만흥산(삼흥에 위치)의 사녕골에 있는 집터를 확인하고 95년 2월24일날은 친척들과 함께 조사하여 비자나무골을 지난 사녕골이 박분이 맨처음 터잡고 살아온 곳임을 확정지었다. 박광헌으로 이름을 고쳐 강진의 삼흥에서 살아온 뒤로는 아들 현석(玹錫)손자 규범(規範) 증손자 성천(聖天)이 태어났다.

성천(1507.2.7~?)은 11세때인 1517년 4월 15일경에 강진의 집을 떠나 충청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동학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곳 주지의 권유로 밀양 박씨인 승우(承佑)의 부인이던 광주이씨에게 양자로 들어가고 이름은 성위로 바꾼다.

29세때인 1535년에 춘장의 딸과 혼인하고 1541년에 장남 민형(일명 형석)을 낳고, 1544년에 둘째 민장(일명 장석)을 낳았는데 큰 아들인 민형은 강진으로 내려 보내어 조부와 증조를 모시고 살게하니 5대가 강진에서 살게되었다.

29년 4월17일 오전에 감목 그리고 삼강이장과 함께 확인을 하였으나 확정을 하지 못하다가 장흥에 사는 박완식(77)을 통하여 자세히 듣게 되었다. 박씨 집안에 전해오기를 산의 제일 위쪽이 살던 터이며 떠나올 때  대나무를 심어 두었다고 하였다.

해방전에 신흥에 살면서 산감을 지낸 이칠용을 만나 사녕골을 찾았고 두 번째 옮겨 산 연곡은 손씨가 최초로 들어와 살 때 박씨의 집을 사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한다.

최초로 살았던 산은 서쪽은 매자골이며 그속에 연시골이 있고 동쪽은 만흥사이며 그속엔 안까끔으로 부르고 두곳 중간에 솟은 곳은 턱걸이봉이라 한다.

사녕골은 만흥사에 있고 공원묘원의 왼쪽으로 한참 오르면 비자나무골을 만나고 그 다음이 바로 찾던 장소인데 대나무는 길의 위와 아래에 있고 위쪽에는 담장이 세군데에 있다.

두 번째로 삭았던 옷 밥골은 칠량면 1번지이며 경회는 옷나무칠, 시골향으로 적었고 군지에는 옻나무를 키워 나라에 바치던 밭이었다고 해 두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곱칠어질량의 시작이 그곳이 아니었나 의문이간다.

사육신의 반대는 생육신이며 칠량까지 내려와 숨어산 유래는 모르지만 우선 생계, 신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을터이고, 삼흥은 기능인이던 도공이 살아서 뱃길에 능하므로 따라와 산 것이 아닐런지. 다산이 이승훈의 아들인 택규를 초당에서 데리고 살면서 글을 가르친것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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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호 2022-11-13 13:31:06
안녕하세요. 저는 박팽년의 후손입니다. 박팽년은 저의 조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