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영랑 생애 마지막 2년 무슨일이 있었나
[역사추적]영랑 생애 마지막 2년 무슨일이 있었나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9.04.29 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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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그 옛날 강진에 무슨일이 있었나

▲ 영랑이 어려서 학문을 배웠던 보은산 기슭 관서재 모습이다. 영랑생가 바로 뒤편에 있다. 훗날 김영열 화백이 작품활동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대 민의원 낙선후 정치적 갈등 1948년 여름 서울이주
-1950년 9. 28 서울수복 다음날 파편에 맞아 사망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서정시인


6.25 동란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29일 서울 신당동의 한 주택가. 서울수복을 위해 진입하는 연합군의 포탄과 퇴각하는 인민군의 포탄이 여기저기서 소나기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영랑선생은 포탄을 피해 주택의 반공호 속에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포격이 격해지자 반공호는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됐다. 포탄을 피해 반공호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반공호가 좁아졌다. 영랑은 여자와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 반공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때 포탄의 파편이 날아와 영랑의 허리에 박혔다. 영랑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영랑의 후손들을 통해 재 구성해 본 영랑의 사망 당시 상황이다.

영랑선생의 삼남인 현철 씨는 "아버지는 당시 여자와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잠시 반공호를 나왔었다"며 "왜 하필이면 그때 파편이 날아왔는지 그저 운명으로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영랑이 반공호에 있을 때 한 여자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갓난 아이가 바로 훗날 김창한 강진정미소 사장과 결혼한 김행란씨였다.

김행란씨는 당시 한전 비서실장을 하던 김현정씨의 딸이었고 김현정씨는 강진에서 은아소주 공장을 경영한 김안식씨의 아들이었다. 김행란씨는 영랑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안고 있던 어린아이 였던 셈이다.
 

▲ 영랑이 해방 후 당시 대표적 우익단체중의 하나였던 대한독립촉성회 강진군단장을 맡으면서 찍은 사진이다. 강진치안대일동으로 적힌 사진은 해방된 해인 1945년 11월 4일 찍은 사진으로 해방을 새로운 나라로 표현해 건국원년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뒤쪽 목조건물은 현재의 강진경찰서다. 좌측의 흰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영랑 선생이다.
영랑은 1948년 5월 초대 민의원 선거(지금의 국회의원)에서 좌익계열인 차경모 후보에게 패배한 후 정치적 갈등기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영랑은 선거 당시 강진에서 보수우익운동을 주도하면서 대한독립촉성회 선전부장과 강진대한청년단장을 지내 이승만 대통령의 후광을 받았고, 차경모 후보는 한학을 수학한 정도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양조장을 경영하며 건국준비위원을 하다가 좌익계의 지지를 얻었다.

결과는 차경모의 당선이었다.<본지 2009. 2. 19일자 참조> 몇가지 기록에 따르면 영랑은 선거 를 전후해 지역사회에서 좌익으로부터 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후손들에 따르면 1948년 봄 어느 날 생가의 정구코트 뒤쪽과 안채 뒤의 대나무 밭 등 두 곳에서 방화용으로 추정되는 도구들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

당시 지역사회는 좌익계 인사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우익계 지도급 인사들도 좌익계의 테러에 번번이 희생되던 비극의 시대였던 것이다. 영랑은 선거 패배 후 강진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 영랑이 어렸을적 찍었던 가족사진이다. 영랑 선생의 부친 김종호(金鍾湖)씨(흰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중간 사람)의 회갑잔치때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바로 왼쪽 뒤 역시 흰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이 영랑선생이다. 영랑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게 된  다른 계기는 자식들의 교육 문제 때문이었다. 평생 직장 한번 갖지 못 했던 영랑은 서울에 유학 중인 두 자식들의 하숙비에 압박을 받아 오던 중 셋째인 현철씨도 형들이 다니던 학교에 입학 하게 되자 심한 재정적인 압박을 받게 됐다고 가족들은 전하고 있다.
 
영랑은 1948년 여름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영랑은 서울로 이주한 후 지금의 예총전신이었던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 문화단체에서 일했고 김광섭 시인, 문학평론가 이헌구선생, 시인 박목월 선생, 시인 서정주 선생등 당대 유명 문학인들과 교류를 했다.
 
영랑은 다음해 서울로 올라가 이승만 정권하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에 취임한다. 출판국장은 좌익 서적 검열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전문위원들이 따로 있어서 세부 검열을 했지만 잡지 폐간등의 주요 결정은 영랑의 손으로 이뤄졌다. 적지 않은 좌익계열 책자들이 영랑의 결정으로 폐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랑의 이런 일을 좌익들과 북한 정권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영랑은 납치대상 1호가 됐다. 영랑선생과 가족들은 급히 거쳐를 옮겨야 했다. 삼남 현철씨는 "모든 짐을 그대로 놔두고 가장 가까운 집으로 급히 옮겨갔다"고 회고했다.
 
영랑이 1948년 여름 강진을 떠나지 않았다면 영랑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영랑은 우익계에서 활동하며 1948년 5월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낙선했다.

그후로 정치적인 갈등기를 보내다 같은해 여름 강진을 떠났다. 서울에서 출판국장이라는 고위직을 지냈으나 6.25를 만나 포탄의 파편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영랑의 길지 않은 삶은 그의 시가 아름다
운 만큼 큰 아쉬움이 많다.

[독자의견]
-군사행위에 음악 포함필수 ...병영 음악발전 당연한 일
-제주도에 호남원병 300여명 주둔, 강진에서 왔을 것

지난 533호 게재 된 '역사추적, 그 옛날 강진에 무슨일이 있었나<4월 15일자 13면>' 편에 실린 '전라병영성 상업을 일으키고 예술을 풍미했다' 기사에 대해 제주도의 향토사학자 오문복 선생님이 전화를 통해 보충의견을 해왔습니다.
 
오 선생님은 강진 병영에서 음악이 발전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때에는 모든 군사행동이 음악으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합니다. 병마절도사와 같은 주요 관직 이·취임때는 물론 중앙에서 어명이 내려 올 때도 거대한 격식이 차려진 음악이 곁들여졌다고 합니다.

또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도 '향살'이라고 해서 공식적인 음악을 연주했고, 기타 군사들의 이동이 있을 때도 역시 음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영에 소속된 악공과 그의 가족들이 병영인근에 상당수가 살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함동정월의 아버지는 악공이었지요.
 
숙종때 제주도에 들어온 이형상이라는 목사는 제주도의 음악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에서 악공을 집접 데려와 교육까지 시킨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병영을 총괄하는 병마절도사는 목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벼슬입니다. 주변에 막강한 음악집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말기까지 제주에는 호남원병이라는게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는 군사병력이 적기 때문에 호남에서 300~360명이 교대하며 주둔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문복 선생님은 호남원병은 전라병영성에서 왔고 강진~제주뱃길을 따라 제주의 화복항으로 들어왔다했습니다. 병력이 오고 갈때마다 악공들의 연주가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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