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 강진 유학의 근원
[다산로에서] 강진 유학의 근원
  • 강진신문
  • 승인 2009.04.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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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 < 강진군문화재 연구소장 >

때가 봄이라 혈식군자에게 서원사우에서 강론과 제사를 지내는 철이다. 유학의 오랜 전통이다. 강진의 유학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강진의 유학은 수운 출신 조정통(1250~1346)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의 자는 순(淳), 호는 수운(水雲)이다. 유학은 공자를 시조로 하며 정치와 교화가 어긋남이 없이 꼭 들어 맞게 하자는 데 있으며 정치란 형벌과 금령이요 교화란 예법과 도의이다.
 
나라의 국학인 향교는 1127년에 설치되고 1290년에 안향(1243~1306)은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갔을 때 주자전서를 베껴왔다. 1304년에는 섬학전이란 재단을 설치하고 대성전을 건립한 후 공자의 초상을 모시게 된다.
 
이때에 탐진현 수운 출신 조정통이 함께 하여 유학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사람들은 고려 유학자 세 집안 중에서 두 번째이며 호남학파의 태두(으뜸)라 칭했다. 시조는 조계룡, 중시조는 조 겸의 10세 용기가 파조이다.

부친은 8세 성(晟)이며 윤통, 정통 곽희빈을 낳았다. 1270년 문무양과를 장원급제하고 1274년 6월에는 원나라에 가서 바둑을 두어 이기고 원나라에 굴복한 충렬왕을 귀국케하며 1277년 4월 귀국한다.
 
1298년 5월 중순에 우탁과 함께 간사한 무리를 내쫓고 그 공으로 도첨의 시중에 오르고 7월말에 물러나며 8월에는 철야군에 봉직되었다. 고향(탐진)에 내려와 용하지(龍下池)의 밑에 수운정(水雲亭)을 짓고 숙룡(宿龍)에는 학당을 개설하였다.
 
여기서 행적을 「유학교회, 지덕개세, 세인칭 3세교자」즉 유가의 학문을 가르쳐 인도하니 사람이 베푼 은덕을 아는 이가 온 세상을 덮을 만큼 많아졌다. 세상 사람들은 고려때 조부, 아들, 손자의 교육자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의 배위는 좌찬성을 지낸 제주 양씨 횡해(橫海)의 녀이고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출세하였으며 꿈의 실현으로 용룡자를 아들의 이름에 담았다.
 
강진은 대구면 계치에 위치한 대계사에서 받들어 모시는데 그의 아들인 봉강 응룡, 청간한룡, 후손 몽린과 함께 4위를 배향하며 1858년에 창건하였다.
 
축문에 「학문은 바른 길로 곁부축, 충성은 간사한 무리 내치고, 덕은 높고 품성이 고결, 쳐다본 별이요 우러른 산이라」 한다.
 
태어난 수운은 현재의 군동면 안지에서 풍동까지의 지역이며 풍동의 동쪽에도 수운이라 부르는 곳이 있기도 하며 그곳은 강진유씨의 뿌리이다.
 
그는 눈썹과 수염이 흰노인이 살았던 중국 상산의 네 신선에 비유했고 새(마칠새)라는 예언서 100장을 지어 탐진 고을에 묻었으며 세종때는 김극화가 은으로 만든 그릇과 두편의 시를 밭갈다 찾았다.
 
그의 시중에 「고금1리극중신 」즉 삶은 같은데 바둑은 새롭다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며 대물림 시켜야 할 수운의 사상이다
 
인물이다, 인물났다, 큰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고 남을 이롭게 한 일로 가늠하는데 강진 유학에 있어서는 수운만한 이가 드물며 2006년에는 그의 후손 조현수가 다시금 강진출신으로 바로잡아 주었기에 그의 학덕과 충성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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