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1919년 4월 4일 울렸던 강진의 만세운동
[역사추적]1919년 4월 4일 울렸던 강진의 만세운동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9.04.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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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그 옛날 강진에 무슨일이 있었나

▲ 지난 4일 열린 4.4 만세운동 재현행사에서 남포마을에서 기념식을 마친 참석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평동들녘을 지나 강진읍으로 향하고 있다.

"내나라 내민족일인데 너희에게 자백해야할 이유가 없다"


1919년 3.1운동이 같은날 전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오늘날과 같이 통신이 발전한 시대가 아니였기 때문에 만세운동이 3월 1일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광주·전남에서는 3월 10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나 4월 18일까지 계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시말해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지방 곳곳으로 확산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계획을 세웠다가 불발돼 거사가 연기된 사례도 많고, 이 기간 동안 한 곳에서 수 차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도 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광주와 나주에서는 각각 7차례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곡성에서는 다섯 차례의 거사가 일어났다.

강진에서는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터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초에는 3월 25일 강진읍 장날을 D-데이로 삼았으나 준비 부족으로 이를 미뤄 마침내 4월 4일에 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강진의 3.1 운동은 작고한 차부진씨가 1976년에 저술한 '강진3.1운동사'란 저서를 통해 체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강진에서는 '강진 3.1 운동기념건립위원회'가 건립됐고 건립위원회를 통해 저술작업과 함께 지금도 강진읍 강진의료원 길목에 세워져 있는 높이 8m, 넓이 12m의 '3.1운동 기념탑'을 건립하는등 강진의 3.1운동 관련 기념사업을 체계화 했다.

3·1운동 기념탑이 준공된 것은 1976년 5월 9일. 이형희 전 문화원장이 당시 총무부장을 맡아 기념탑 건립수립 계획과 함께 강진출신 열사들의 기록을 찾기 위해 대구형무소를 수차례 찾아 다녔다. 김영 전 강진번영회장은 추진위원을 맡아 성금모금에 앞장섰다.

임상호 전 강진신협 이사장은 홍보부장을 맡아 지역민들에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지역의 인사들에 대한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추진위원들의 1년여간 노력은 700여만원의 성금을 모을 수 있었다. 여기에 당시 독립운동 기념탑을 후원하는 서울지역 신문사의 지원이 더해져 총 850만원의 공사비로 기념탑이 들어섰다. 기념탑의 뒷면에는 당시 독립만세를 외쳤던 지역출신 26명의 의사(義士)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진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진 과정을 살펴보자.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에서 33인에 의해 3. 1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기 직전에 일본에서 '2.8 독립선언'이 나왔었다.

'2·8독립선언서'는 당시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차부진씨의 저서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는 김안식씨와 차문수씨, 손치은씨등 3명의 강진출신 유학생이 있었다. 이중에서 김안식씨는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멤버였다. 김안식씨는 1918년말에 한국으로 밀파되어 독립운동기금을 모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 지난 1976년 강진읍 서성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탑. 원내는 준공식이 열리는 모습이다.
또 서울에 유학중인 학생들도 수십명에 달했다. 여기에 강진은 강진읍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강진읍의 기독 청년 이기성(李基性)씨, 황호경(黃鎬京)씨 등은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강진에는 이렇듯 만세운동의 잠재적 열기가 내면적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3월 20일, 드디어  조선청년독립단의 핵심이면서 동경(東京) 유학생이던 김안식(金安植)씨가 귀향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안식씨는 강진읍의 청년 김영수(金永洙)씨, 김학수(金學洙)씨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는등 뜻을 같이한 사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3월 25일을 기하여 읍내에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22일 밤에는 읍내 서성리(西城里) 김현균(金玄均)의 집에서 김윤식(金允植)·김현상(金炫庠)·김성수(金性洙)·김영수 등이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선언서를 작성하는 등의 모든 준비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영랑 김윤식씨, 김현균씨 등은 돈을 모아 태극기를 제조하고 이기성·황호경 등도 이들과 계획을 같이 하여 25일 장날을 기하여 공동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월 25일의 거사계획은 부득이 연기돼 다음 강진읍 장날로 미루게 되었다. 또 일제경찰이 정보를 파악하고 관련자들을 검거하기도 했다.

3월 31일에는 서울에서 배재(培材)학교 학생 오승남(吳承南)이 귀향하게 된다. 강진읍 출신인 오승남은 서울에서도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나 3월 말경 각 학교가 휴학에 들어감에 따라 고향으로 온 사람이었다.

4월 2일에는 김현봉·황호경씨 등이 강진읍 서성리 이기성의 집에 모여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 했다. 이기성과 김현봉 등은 남포마을 교회에 찾아가  강주형(姜宙馨)·박영옥(朴英玉) 및 김춘석(金春錫) 등에게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로 마음을 합했다. 이들은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 약 300개, 선언서 70통, 독립가 20여 통을 준비하였다.

4월 4일 김한봉·황호경·오승남·김춘석 등은 아침 9시경에 이기성의 집으로 모였다. 이날의 운동방법 등을 최후로 결정하고, 준비된 태극기·선언서·독립가 등을 따로따로 나누어 강진읍 장터로 운반하였다.

강진장날인 4월4일 정오에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김후식씨등이 태극기를 군청 뒷산에 꽂은 후 오응추씨, 김제문씨등이 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줬고 이기성등이 선두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 참석한 인원은 3천여명에 달했고 강진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이은표등을 주축으로 보통학교 60여명의 학생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날 경찰과 수비대, 현병대등 100여명이 동원돼 만세참가자를 체포했고 이때 비밀을 자백하라는 검사의 말에 만세시위에 참여한 남포마을의 여성 박영옥씨가 "내나라 내민족일인데 너희에게 자백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당당히 맞서 싸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날 행사에 적극 가담했던 강주형, 박학조, 박영옥, 차명진, 정헌기씨가 강진읍 남포마을 출신으로 주민들은 마을입구에 이들을 기리기위해 3·1운동기념비를 1992년 8월 15일에 세우고 매년 4월 4일이면 기념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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