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다산사경첩 단상(斷想)
[다산로에서]다산사경첩 단상(斷想)
  • 강진신문
  • 승인 2009.03.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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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만<성화대 교수·한국사>
얼마전 한 고서점에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서점은 평소에도 책값이 다소 비싸다고 여기던 곳이었다. 90년대 후반 강진을 찾는 관광객에게 다산초당 근방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던 책자의 값이 너무 비싸게 매겨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으로, 부제에 다산친묵(親墨)이라 적힌 소책자였다.

예전에 이 책자를 구입하긴 했지만 당시에 잠깐 보았을 뿐,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았기에 이곳저곳을 뒤적여서 찾아보게 되었다. 표지부터 그 단아한 글씨체가 마음에 와 닿았다. 평소 서체에 흥미가 있었던 관계로 하나하나 열심히 눈여겨보면서 왜 이제야 이 좋은 글귀를, 이런 계기를 통해 보는가하고 자탄의 소리가 절로 났다.

주지하듯이 다산 4경은 다산초당 전후좌우에 있는 다조, 약천(藥泉), 정석(丁石), 그리고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 모두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그야말로 다산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4경은 다산이 순조 8년(1808) 그의 나이 47세 때 봄에 지금의 다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 역사는 시작되고 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통해서 보면 자세히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는데, "이 때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고, 석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겼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새로 이사를 하면서 초당에 건조물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다산초당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이책 저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산 4경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다산의 흔적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다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이곳에 4경을 만든 것은 아마도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새로운 생활을 꿈꾸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서적 천여 권 운운은 이후의 강진문화에 변화를 야기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다산사경첩에는 이외에도 순암호기(淳菴號記)라 하여 귤원 윤규노의 4자인 신동(信東)에게 순암이라는 호를 지어주는 과정을 적은 내용이 있으며, 이어서 다산제생문답증언문(茶山諸生問答證言文)이라 하여 다산초당의 제생인 기숙과 금계가 해배(解配)된 다산을 고향 마재로 찾아가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념하여 써 준 글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비록 자신이 없더라도 옛날 자기가 거처하며 지냈던 다산초당을 제대로 유지, 보존시켜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담았으며, 그 글씨는 아마도 다른 것보다 더욱 호방한 모습이 보일 뿐만 아니라, 먹의 강약을 더하면서 쓴 다산 글씨체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뒤를 이어 독서(讀書)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독서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큰소리를 치는 것이니, 헛되이 교만이나 부리고 공연히 떠들기만 하는 것은 패덕(敗德)의 기틀이 된다. 안정하고 치밀하면 기억에 담아놓은 것이 이에 풍부해지고, 공근(恭謹)하고 중후하면 자질이 이에 아름다워지니 경계하라"는 것인데, 요즈음의 우리에게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글귀가 아닌가 한다.

비록 한 서점에서 찾은 소책자로 인해 잠시 단상에 젖어보았지만, 우리가 진정 내 곁에 있는 소중한 물건을 그냥 방치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요즘 기상이변과 경제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변의 선현이 전해주는 말씀을 곱씹어볼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쁘지 않을까. 봄맞이로 시간을 내어 다산초당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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