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영랑 김윤식 선생 셋째아들 김현철 선생
[인물포커스]-영랑 김윤식 선생 셋째아들 김현철 선생
  • 김영미 기자
  • 승인 2008.11.21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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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은 아버님 詩의 토양"
▲ 미국에서 영구 귀국한 영랑 선생의 셋째아들 현철씨가 영랑생가 앞 돌담길에서 어릴적 아버지와의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김영랑 시인 금관문화훈장 추서, 셋째아들 김현철 선생 생가 나들이
올해 미국서 영구귀국... 영랑선생과 현대인 연결하는 마지막 생존자

영랑 김윤식을 연구한 수 많은 논문들이 있지만 그의 혈육이 풀어 놓은 옛날 이야기 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은 없다.

영랑선생의 셋째아들인 김현철(74)선생을 만나면 아버지 영랑에 대한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지난 19일 영랑 생가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영랑선생은 풍채와는 달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작고하기 한해 전인 1949년 10월 서울 명동의 문예빌딩에서 시인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시낭송회가 열렸다.

문예빌딩은 시인 모윤숙씨 소유였다. 영랑선생도 그 자리에 초대받아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낭송했다. 그런데 시를 낭송하는 방법이 하도 어눌하고 수줍어서 마치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듣고 있던 황금찬 시인이 한마디 했다. "선생님, 그 좋은 시를 그렇게 읽으십니까". 박목월시인도 거들었다. "멋있는 시인데 멋있게 좀 낭송하시지 그러셨어요"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얼굴이 붉혀진 영랑선생이 말꼬리를 흐렸다. "내 시를 내가 어떻게..."
 
이 이야기는 당시 시 낭송회에 참석했던 사람중에 유일한 생존자인 황금찬 시인이 현철 선생에게 들려준 말이다.

영랑선생이 혈육이 아니면 좀처럼 전해듣기 어려운 역사이다. 김현철 선생은 "나도 누구앞에 나서길 부끄러워하는 편인데 아마도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김현철 선생은 이렇듯 영랑 선생과 오늘날 현대인들을 가장 진지하고 생동감있게 연결시켜주는 마지막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다.        
 

영랑 김윤식을 연구한 수 많은 논문들이 있지만 그의 혈육이 풀어 놓은 옛날 이야기 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은 없다. 영랑선생의 셋째아들인 김현철(74)선생을 만나면 아버지 영랑에 대한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다. 지난 19일 영랑 생가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영랑선생은 풍채와는 달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작고하기 한해 전인 1949년 10월 서울 명동의 문예빌딩에서 시인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시낭송회가 열렸다. 문예빌딩은 시인 모윤숙씨 소유였다. 영랑선생도 그 자리에 초대받아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낭송했다. 그런데 시를 낭송하는 방법이 하도 어눌하고 수줍어서 마치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듣고 있던 황금찬 시인이 한마디 했다. "선생님, 그 좋은 시를 그렇게 읽으십니까". 박목월시인도 거들었다. "멋있는 시인데 멋있게 좀 낭송하시지 그러셨어요"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얼굴이 붉혀진 영랑선생이 말꼬리를 흐렸다. "내 시를 내가 어떻게..." 이 이야기는 당시 시 낭송회에 참석했던 사람중에 유일한 생존자인 황금찬 시인이 현철 선생에게 들려준 말이다. 영랑선생이 혈육이 아니면 좀처럼 전해듣기 어려운 역사이다. 김현철 선생은 "나도 누구앞에 나서길 부끄러워하는 편인데 아마도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김현철 선생은 이렇듯 영랑 선생과 오늘날 현대인들을 가장 진지하고 생동감있게 연결시켜주는 마지막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올해 고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강진중앙초등학교 졸업 직 후 14세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에서 MBC등 언론계에서 기자생활을 한 후 39세때 미국길에 올라 그동안 미국 플로리다주에 거주 했었다.
 
19일 선친의 금관문화훈장 추서를 기념하여 강진읍 생가를 찾은 김현철 선생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밝은 모습으로 옛날을 회고했다.
 
영랑생가 뜰에 선 현철 선생은 "어릴적 살던 나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돌담문이 있어 선친의 눈을 피해 밖으로 놀러 나가려 했지만 아버지의 불호령을 듣고다시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며 "가정교육이 엄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놀아야하는 어린시절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옳은 길을 걷게 하려는 아버지의 교훈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회고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 선 현철 선생은 "아버지는 은행나무 가지에 판자를 얹어 매미소리를 들어가며 낮잠을 자게 만들에 주기도 했다"며 "은행나무는 놀이시설이 없던 어릴 적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던 추억의 장소였다"고 설명했다.
 
현철선생은 "아버지가 작고한 58년 후 금관문화훈장을 받게 되어 감회가 깊다"며 "유가족들이 강진군민들을 위해 금관훈장을 군에 기증해 보존하고 방문객들이 참관 할 수 있도록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현철선생은 부인 김연순(71)씨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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