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강진 정약용과 흑산도 정약전
[기획취재]-강진 정약용과 흑산도 정약전
  • 김철 기자
  • 승인 2008.11.21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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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 목놓아 울던 굴봉산 정상 오르니
멀리 동쪽으로 '약용' 있던 만덕산 보일듯
▲ 정약전이 동생을 그리워 하며 거닐었던 띠밭너머 해수욕장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그리던 동생 다산 만나지 못하고
유배 16년째 1816년 우이도서 생 마감

1801년 음력 11월 22일 나주의 북쪽에 위치한 밤남정에서 서글픈 이별을 맞이한 약전·약용형제는 서로 유배지를 향해 떠나게 된다.

형 약전은 당시 정확한 유배항로는 알기 힘들지만 영산포에서 뱃길을 이용해 유배지로 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포의 뱃길을 따라 약전이 도착한 곳은 우이도(牛耳島). 섬의 움푹한 부분의 형태가 마치 소의 귀를 닮았다는 우이도에서 약전은 본격적인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신안군 도초면에 속한 우이도는 조선시대에 소흑산도로 불리었다. 본섬 흑산도는 뱃길이 험해 유배되는 죄인을 데리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이에 관리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 흑산도 본섬 뱃길보다는 소흑산도였던 우이도에 죄인들을 내려놓고 육지로 돌아가곤 했다. 약전도 마찬가지로 본섬 흑산도보다는 육지에서 가까운 우이도에 내려지게 된 것이다.
 
목포여객터미널에서 철부선 섬사랑6호를 타고 3시간여 남짓의 뱃길을 달려 도착한 우이도1구 진리마을. 다도해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문명의 혜택보다는 아직도 과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마을 중의 하나이다.
 
현재 40여 가구가 생활하는 진리마을은 약전이 우이도에 처음 도착한 곳이다. 진리마을은 1.5m높이로 돌담을 쌓아 매서운 해풍을 막았던 전통가옥의 형태는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약전의 생활도 비슷했다. 33㎡(10평) 남짓한 집터는 현재 작물을 기르기 위해 모두 밭으로 변해버렸지만 아직도 동생을 그리워하는 약전의 눈물은 그대로 인듯하다.
 
진리마을 뒤편에는 굴봉산이 자리 잡고 있다. 약전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주 올랐던 산이다. 약전의 발길을 뒤쫒고 싶어 올라간 굴봉산은 그리 쉬운 산길은 아니였다.

과거 주민들이 지붕을 엮을 때 사용하는 띠가 온통 산을 뒤덮고 각종 돌멩이들이 연결돼 가파른 산길을 만들고 있었다.

30여분의 산행을 지나 올라간 굴봉산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약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서학으로 배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낯선 우이도에 유배돼 혼자 생활하는 약전은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보냈을 것이라는 측은함이 먼저 밀려왔다.

또 바다 건너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생 약용을 보고 싶어 더욱더 그리움이 사무쳤을 것이다. 아마 약전은 굴봉산의 정상에 올라 수없이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을 듯 싶다.
 
굴봉산을 뒤로 띠밭너머 해수욕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이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띠밭너머해수욕장은 깨끗한 바닷물과 모래로 유명하다.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게를 비롯한 각종 어패류를 만나볼 수 있던 띠밭너머해수욕장에 약전은 자주 찾아왔다. 이곳을 거닐면서 약전은 바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약전이 생활했던 집터의 모습.
우이도에서 한(恨)많은 세월을 지냈던 약전에게 친구가 되어 준 사람은 이곳의 문순득(文淳得)이라는 사람이다.

당시 흑산도 홍어를 영산포 등에 판매했던 문순득은 마을에서 엄청난 부자로 통했다.

육지에서 이름난 선비가 유배로 우이도로 찾아들었고 문씨는 약전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우의를 다졌다.
 
약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씨를 소재로 하나의 글을 쓰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문순득의 표해록'이다.

약전은 당시 문씨가 표류생활을 하면서 겪은 생생한 기록을 토대로 표해시말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기게 된다. 문씨는 1801년 겨울 대흑산도에서 홍어를 사서 싣고 오다가 표류를 하게 된다.
 
문씨는 일본의 오키나와, 중국, 필리핀을 거쳐 3년여간의 표류과정을 약전에게 들려줬고 이를 다시 글로 남긴 것이 표해록이 된 것이다. 문씨의 이런 활동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돼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문씨와 약전의 돈독한 우정은 다산에게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전과 약용형제는 유배중에도 많은 서찰을 통해 자신의 처한 상황 등을 서로 의견을 나눴다. 이런 서찰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문씨였을 것이다.

홍어판매로 영산포를 자주 다녔던 문씨가 두 형제의 끈끈한 형제애를 이어주는 연결자 역할을 맡은 것이다.
 
▲ 천주교 신부들이 정약전을 찾아와 남기고 간 글이다.
우이도를 떠나 흑산도로 들어간 약전은 유배에서 풀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좋은 우이도로 1814년 다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약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 16년째인 1816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약전의 장례절차도 막역했던 문씨 집안에서 맡아 치러졌다.

이에 약용은 모든 장례절차를 치러준 문씨집안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문씨 집안은 약전이 우이도에서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인터뷰-약전 유배생활 도왔던 문순득씨 후손 문종옥씨

"귀양살이온 약전선생 우이도에 많은 문물 가져와"

우이도 진리마을에서 약전의 유배생활을 도왔던 문순득씨의 후손인 문종옥(54)씨를 만나 약전의 생활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문씨는 "손암 정약전선생은 우이도에서 처음 유배생활을 시작했고 생을 마감한 역사적인 곳"이라며 "정약전 선생의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쉽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씨는 "우이도는 과거 수군의 본진이 위치해 있었고 기와로 된 집들이 10여채가 넘을 정도로 무역의 요충지였다"며 "지금도 당시의 집터로 볼때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가진 주민들이 생활했을 정도로 우이도는 번성했다"고 덧붙였다.
 
표해록의 주인공이 됐던 선조 문순득씨에 대해 문씨는 열변을 토했다.

문씨는 "필리핀을 비롯한 3년여간의 표류를 마치고 돌아와 손암선생(약전)을 우이도에서 처음 만난 것 같다"며 "당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했던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온 손암선생을 각별하게 돕고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문씨는 "당시 손암선생은 우이도에서 서당을 짓고 많은 학생들을 교육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은 집터밖에 남지 않았지만 우이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 약전"이라고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문씨는 "할아버지가 손암선생과 친분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선생과도 교류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산선생이 문순득 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의 이름을 직접 여송이라고 지어준 것도 이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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