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려자기 도굴꾼들
[기고]고려자기 도굴꾼들
  • 강진신문
  • 승인 2008.08.0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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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연<병영면 성남리>

1920년대나 3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려장이나 고총을 파헤쳐 자기류를 도굴하는 도굴꾼들이 많았다.

일본인들이 이민해 조선에 온 후 고려자기가 귀한 것인 줄 알고 혈안이 되어 수집했다. 그것은 일본 본국에 가지고 가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처럼 고려자기에 대하여 그 가치를 알고 수집하는 사람은 아마 다른 나라에는 없었을 것이다.

1922년에 야나기 무네요시란 학자가 『조선의 예술』이란 책을 출판하였는데 조선의 자기에 있어서는 조선인보다 더 알았고 더 사랑했고 식민지의 산물이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그 가치를 알고 사랑했었다.

그 저서에 의하면 "조선에 대하여 불행한 것은 조선은 지금 이러한 일을 의식할 겨를도 없거니와 흥미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것이 자기 나라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그 민족의 원수로 간주되고 있는 일본일인 우리가 그 미를 옹호하려 하고 있다"라고 우리 민족으로선 부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때의 현실이었으니 어찌하랴.

본론으로 돌아가 도굴꾼들은 2,3명이 한패가 되어 창과 괭이, 호미 등의 굴착기구들을 들쳐 메고 고려장인 듯한 곳은 샅샅이 뒤졌다. 조선의 당시 정서는 고총이라도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고려자기를 서로 먼저 획득하여 팔아먹으려는 마음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낮에는 경찰관 주재소에서 안 보일만한 먼 산에서 버젓이 도굴하였고, 단속이 심해지자 낮에 장소를 봐 두었다가 밤에 파가곤 했다한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퍼졌던 말은 고려자기에 음식을 담아 놓으면 음식 맛이 오래도록 변치 않는다고 했었는데 이러한 말은 꽤 오래도록 계속해서 내려왔다.

나의 먼 친척 되는 분이 우리 마을 사람과 별락산 밑자락과 마을 동쪽 수첩골의 산을 샅샅이 뒤져 고려자기와 다른 그릇 등을 많이 팠었는데 어린 시절의 호기심에 그 그릇들을 정리할 때 마을 어귀에서 했었는데 값나갈 만한 그릇은 다 챙기고 사가지 않을 토기를 버리려 하기에 나 주라고 했더니 거저 주었다.

그걸 호기심으로 간직하고 있었다가 잊고 있었는데 1996년에 백양교회사와 마을사 제의가 있어 문득 생각난 것이 이 마을이 언제부터 있었을까? 그 토기의 제작시대를 알면 마을의 시원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광주박물관에 전화하여 이러한 토기가 있는데 시대 감정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가져오면 감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1996년 가을 광주박물관에 가서 감정한 결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의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백양마을은 신라시대부터 아니면 그 이전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았는가 추측할 수 있었다.

어려서 보기에도 파랗고 고운 무늬가 있는 고려자기를 사갈 사람은 일본인밖에 없기에 일본인 집을 찾아가 사라고 하면 얼마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러면 더 올려주려면 도굴품으로 고발하겠다는 말을 하면 울며 겨자먹기로 할 수 없이 주라는 대로 팔고 나온다. 그래도 시골 농사꾼으로서의 벌이로는 대단한 금액이었기에 도자기 도굴은 그칠 줄 모르다가 1960년대에는 사라진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사가지고 모은 것이 현재 일본에만 일만 개가 된다, 아니면 2만개가 된다라는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숫자나 소장자 파악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후손으로선 한탄 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김흥연옹의 회고록 '진실한 삶을 위하여'에서 청자와 관련된 글을 청자문화제를 맞아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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