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 1930년대 화려한 문단활동, 문단 역사적 평가
현구 - 초야에 뭍힌 일평생, 1970년에야 유작 발표
영랑 김윤식 선생과 현구 김현구 선생은 강진이 배출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정시인들이다. 태어난 곳은 영랑선생이 강진읍 남성리 221번지이고 현구선생이 영랑생가와 가까운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이다.
태어난 시기도 영랑이 1902년, 현구가 1903년으로 비슷하다. 둘은 풍족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공통점과 함께 강진의 향교였던 관서제등에서 학문도 함께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시인으로서 극명히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영랑은 활발한
훗날 다양한 현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오늘날 현구는 영랑과 쌍벽을 이루는 강진출신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구가 시인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6일 전남문인협회가 강진문화원에서 개최한 '현구시와 삶의 재조명'이란 심포지엄에서 그 이유를 알수 있는 내용이 조금 발표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전남 문인협회 이순자 부회장은 그는 지나친 결백의식이 자신을 초야에 묻힌 시인이 되게 했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 부회장은 "현구시인은 휼륭한 시인이며 열심히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지나치게 결백해서 자기 작품 수준이 낮고 가치가 없다고 늘 생각했다"고 밝혔다.
한때 시집발행을 계획도 했으나 당시 활동을 같이했던 박용철의 사망으로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영랑과 현구는 아주 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8년 영랑의 첫 부인이 사망하자 "M부인에게" "너는 산새처럼 가버리고"라는 3편의 애도시를 영랑에게 써주기도 했다.
이부회장은 "현구는 영랑과는 둘도없는 벗이었으며 영혼의 동반자인 동시에 가장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남도 문학의 뿌리를 찾아서'란 주제로 진행됐다. 광주교육대 전원범 교수는 '김현구 시문학 재평가의 과제'란 주제로 발표에 나서 85편의 시를 남긴 김현구 시인을 소개했다.
전남문협 조수웅 회장은 "심포지엄은 영랑에 가려 있는 김현구 시인의 시와 삶을 재발견하기 위해 가졌다"며 "전남권 문인들이 오늘을 계기로 재출발이라는 마음을 갖고 알려지지 않은 현구 시인의 작품 발굴에 노력해 나가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