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의 당전마을
고려때의 당전마을
  • 강진신문 기자
  • 승인 2003.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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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강진문헌연구소장>

얼마전 모 텔레비전에 소설가 최인호씨가 장보고의 행로를 따라간 특집프로 ‘해신 장보고’가 방영된적이 있다. 최인호씨는 장보고의 행로를 추적하다 장보고가 청자기술을 도입해 제작을 했던 곳이 대구 사당리일대라는 것을 알게된다.

장보고와 청자의 관계가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새삼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럼 고려때의 당전마을은 어떠했을까.

강진군의 1읍 10개면 중 하나인 대구면은 수없이 많았던 고려 도자기의 가마에서 불을 때던 연기가 하도 많아 화구소라고도 불렀고, 3분의 2가 산이며, 군의 동남에 위치한다. 고려 때의 당전은 특수한 신분을 지닌 도공들의 행정 치소였으며, 금속활자, 팔만대장경과 함께 고려를 상징하는 ‘도자기 성지’가 된 것이다.

당전 마을은 여계산 3분의 2의 기슭에 위치하며 윗마을과 아랫마을(청자사업소)로 나뉘어 있다. 먼저 웃마을은 화구, 땅뜸, 장전, 당전 등으로 바뀌어 온 듯하며, 아랫마을은 객사동이었다가 강점기 때 당전으로 합쳐져 오늘에 이른 것 같다.

대구면에 남아있는 도요지는 항동, 용문, 계치, 청룡, 수동, 당전, 미산, 백사 등의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조사 자료에 의하면 용운리에 있는 3개소의 토기요지와 10세기말 용운9호의 요지를 초기로 보고, 11세기부터는 용운, 계율, 수동, 사당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웃에 있는 칠량면 삼흥과 명주리도 11세기부터 생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사당리는 현재의 당전, 미산, 백사 3개 마을에 남아 있는 요지이며, 국가지정 40개소, 미지정 13개소 등이 있는데 파괴된 요지도  이 숫자 못지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생산된 고려청자 중 강진을 위주로 하여 가장 양질의 제품이 생산되었고, 국보지정 70%가 탐진산이고, 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요지에서 생산하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우선하므로 지금은 도자의 성지로 불러주고 있다.

세계의 도자기 역사상 우리나라에서만 생산된 고려 상감청자는 순청자의 뒤를 이은 제품으로 최전성기이던 12세기의 상징물이다. 이 때에는 사기그릇을 굽던 곳을 맡은 자기소가 설립되고, 그 소에 살고 있는 민을 중심으로 작품을 생산하여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소의 향리에 의해 한곳으로 모았다가 광흥창(원래는 좌창이나 1308년에 고침) 배에 싣고 바닷길을 이용하여 수도인 개경에 올려 보내면 왕실, 관청,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급 청자이다.

13세기까지는 의식용이나 신분이 높은 지위에 있던 특정인이 사용하였으나, 14세기기가 되자 실생활에 맞도록 사기의 전용화를 법으로 권장하게 되었다.

대구면의 요지 가운데 가장 늦게 개설된 것은 14세기 전반기부터인데 거의가 현재의 미산에 남아 있는 요지이다. 이 때는 많은 양을 생산해야 되므로 무늬를 도장으로 찍거나 틀에서 찍어내는 기법이 사용되어 단순하거나 조잡한 제품이 많게 된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가마의 불이 그칠 무렵부터는 관제의 기능이 없어지고 왜구의 침입으로 끝을 맺었다가 1980년대부터 재현되고 있다.

발굴 작업에 참여할 때인 60년대 어느 날 나는 “이 곳에서 세계 도자기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야말겠다”라고 하니 곁에 있던 전문학자 한분이 “꿈도 크다”고 하였으나, 그 일은 수 년 전에 이루어졌는데 아직도 못다한 소망이 더 많다.

‘고려 때의 당전은 자기소’라 결론지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행정치소의 건물을 중심으로 배산임수와 동쪽의 향교, 서쪽의 사직단 그밖에 죄수를 가두는 옥사장과, 사신들이 쉬어가는 객사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행정치소가 있었던 곳은 ‘땅골’이라 하고 작천에도 남아 있으니 간접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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