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포 원류를 따라 <27>-파산천 2 (돌아오지 않는 황어)
구강포 원류를 따라 <27>-파산천 2 (돌아오지 않는 황어)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6.12.21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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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포 일대 떼지어 뒤덮던 붉은 빛 황어는 어디로....

    황어가 돌아오지 않는단다.

  이름부터 생소하겠지만 분명 탐진강에는 황어가 떼지어 다닐 정도로 흔했다. 파산천과 백금포 일대의 사람들에게 황어에 대해 물으면 “아하, 그 예쁜 고기?”라고 되물으면서 새삼 놀라워한다.

여태 황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살았던 까닭이다. 이곳 강마을 사람들의 말처럼 ‘예쁜 고기’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황어가 성장해 산란기가 되면 ‘혼인색(알록달록한 붉은 빛)’을 띠기 때문이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탐진강의 관산보 아래는 황어의 주요 산란처였다. 하지만 1~2년의 기간을 두고 어느 날 갑자기 황어가 발길을 뚝 끊어버린 것이다.

 아직까지 황어잡이를 했던 백금포 마을 사람들이나 석교다리 부근의 사람들도 그 이유를 한결같이 모르겠다고 한다. 어쩌면 황어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고급 어종이 아니어서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황어가 많이 올라오면 그 해는 가물고 흉년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 또 가시가 많아서 황어가 낚시에 걸리기라도 하면 복어취급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탐진강에서 사라져버린 어종 중에서 유난히 주목받고 있지 않는 고기가 바로 황어이다. 이렇듯 은어가 종종 올라와 탐진강의 어사(漁史)를 근근이 이어간다면, 황어는 그 명맥이 이미 끊겨서 영영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라 하겠다.


  돌아오지 않는 황어에 대해 알아보고자 파산천 아래 오산마을을 다시 찾았다. 겨울비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그리 춥지는 않았다. 한겨울의 한기는 눈발이 내려야 시작할 모양이다.

오산마을에는 ‘탐진강 어사(漁史)’의 산증인이 살고 있다. 그가 바로 오산마을 이장 김평준(67세)씨이다. 김평준씨는 지금은 어로행위를 하지 않고 있지만 무려 25년간 강에 목줄을 메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 첫 번째 만남에서 맡지 못했던 강물냄새가 났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강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강해형 고기들이 민물을 쐬어야만 산란과 성장을 거듭하기에 탐진강은 고기들의 낙원 같은 회귀장소였을 거다.

명태만큼이나 크고, 연한 푸른색 등과 배에 노란 갈색을 띈 황어가 탐진강에 오를 때면 물 속은 향연을 펼친 듯이 아름다웠다. 특히 산란 할 때면 거의 붉은색으로 변한 몸 때문에 강물이 온통 단풍물이 든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사라져버린 황어잡이

 

  탐진강의 황어는 음력 정월에 올라와 벚꽃이 피는 사월 한 달 동안 산란을 시작하고 부화한다. 4㎝로 자라 치어 상태를 면할 때쯤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3~4년 동안 바다에서 자라 30~40㎝ 쯤 되면 다시 태어난 탐진강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습성처럼 태어난 곳에서 산란하기 위해서이다. 그때의 몸 빛깔은 울긋불긋한 혼인색을 띠고 있다가, 산란을 마치면 흑갈색으로 변해버린다고 한다.


  백금포에 사는 김재택(79세) 옹에 따르면 백금포 근방의 강 아래에서 투망질 하면, 황어를 한 지게 가득 담아갈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백금포 일대가 강둑을 사이로 보리밭과 강을 두고 있었기에 그물에 걸린 황어를 보리밭에 펼쳐놓으면 오지게 볼만했다고 한다. 백금포가 물과 바닷물이 교차해 그곳에 많은 어종의 물고기들이 서식했던 곳이기에 그럴 만도 했다.

김재택 옹은 황어가 제수용으로 쓰이기도 했고, 회와 매운탕이 일품이었기에 그 당시 강진 일대에서 은어와 함께 최고의 미각을 돋우는 어종이었다고 회고했다. 작은 은어에 비해 큰 명태만큼이나 큰 황어이기 때문에 수요가치도 컸으리라는 짐작도 간다.


  김평준씨는, 황어잡이와 은어잡이는 그물과 어로방식이 엇비슷하다고 했다. 보통 양철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쳐 잡기도 했지만 큰 물이 질 때는 강둑에서 투망질만 해도 쉽게 잡을 수 있는 고기가 황어라는 것이다.

간혹 황어의 생태를 오랜 경험으로 가늠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고기를 산란장소로 유인해 한꺼번에 다량의 어획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평준씨는 탐진강 어부답게 황어의 산란을 그림으로 그리듯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황어가 산란하는 장소는 얕게 흐르는 여울목 정도가 적당한데, 보통 작은 돌멩이 위에 숫컷이 하얀 점액질을 분비하면 그 위에 암컷이 노란 알을 낳아 붙여놓는다고 한다.

어떨 때는 황어의 산란을 훔쳐보느라 넋을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평준씨처럼 이런 생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미리 산란할 장소를 만들어놓고 몰려드는 황어를 어획했다는 말도 맞는 말일 것 같다.

황어잡이가 한창 성숙기일 때 하룻밤에 300~1,200마리를 잡았다고 하니 탐진강에 얼마나 많은 황어가 회귀해 서식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어가 많이 사는 곳은 석교다리 위의 관산보 아래였다. 석교마을에서 지금도 양어장을 하고 있는 조의기(68세)씨에 의하면 집 앞의 석교부근이나 관산보 아래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황어가 많았다고 한다.

불법어획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때라 강물에 폭약을 터트려 황어를 잡기도 했다. 폭약이 터지면 물과 함께 하얀 비늘을 뒤집은 황어새끼들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장관은 또 다른 볼거리였다고 회고했다.

지금이라면 무분별한 남획처럼 여겨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떼로 몰려다닐 정도로 광범위한 산란처를 제공했던  탐진강이었기에 이런 불법어획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는가 싶었다.


  구강포의 강줄기에서 황어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유는 좀처럼 밝혀내기가 어렵다. 고서 중에 서유구의 ‘난호어목지’나 ‘전어지’에는 황어가 잉어과에 속하는 어종이어서 서해에서 많이 잡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섬진강 일대와 동해안에만 서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식 같은 얘기지만 그 첫째 요인은 황어가 산란처로 삼을만한 마땅한 서식 환경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짐작해 본다.

특히, 황어가 산란하기에 좋은 장소는 물이 얕게 흐르는 여울목이고, 모래와 자갈이 깔려있는 깨끗한 물이라야 한다. 그런데 구강포 일대는 개펄이 유입되고, 생활하수들이 자갈에 축적된 것이 요인이 아닐까 싶다.

또 석교마을 조의기씨의 말처럼 우리가 모르고 있는 황어가 회귀할 수 없는 조류 변화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탐진강 어부 김평준씨는 아직도 관산보 아래에서 투망질로 황어를 잡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황어를 잡기 위해 투망질을 하다가 물살에 쓸려 실종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지만 강마을 사람들만의 타고난 업이기에 그것마저 그립다고 했다.

김평준씨처럼 아버지의 강이 자식의 강으로 내리물림 돼 구강포는 살이 돋고 피가 돌아 오늘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강포를 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연어와 은어를 돌아오게 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줄 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간 황어를 돌아오게 하는 사업도 함께 벌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30여년 전 지금은 황어잡이를 위해 그물과 투망을 손질할 때다. 정월이면 붉은 빛을 띤 황어가 떼지어 올라와 구강포 일대를 뒤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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