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군동 풍동리 봉산마을
[마을기행]군동 풍동리 봉산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11.02 1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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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면소재지를 지나 장흥과 경계를 이룬 곳이 군동면 풍동리다. 남미륵사에 자리한 대형 청동 불상의 온화한 얼굴이 바라다 보이는 풍동리는 풍동, 봉산, 벽송, 명암의 4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명암마을을 제외한 풍동 3리는 마을을 이어주는 골목이 각 동네를 구분하고 있을 뿐 한마을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풍동리 초입에 이르면 두 갈래의 골목을 따라 작은 이정표들이 각 마을의 위치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왼편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봉산마을로 향했다. 점심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마을은 한적한 모습이다. 요즘처럼 부지깽이도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는 때이고 보면 당연한 농촌마을의 풍경이다.

수확이 끝난 들녘에서는 볏짚을 거두는 주민들의 손길이 바쁘고 보리를 파종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일들도 많다. 화창한 가을 날씨에 집안에만 머물러 있을 주민들은 그만큼 드물다. 그래서인지 낯선 이에 놀란 견공들만이 요란하게 짖어댈 뿐 주민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회관 부근에서 윤영태(51)이장을 만났다. 미리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윤이장은 바쁜 농사일을 잠시 미뤄두고 기자를 반겨주었다. 윤이장에 따르면 봉산마을은 40여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인근 마을보다 40~60대 주민들이 많기 때문에 풍동 3리의 농사를 대부분 도맡고 있는 곳이 봉산마을이다. 마을주민 중 20여명이 40~60대로 인근 마을의 비해 젊은이들이 많다는 윤이장의 설명이다.


봉산마을은 미맥 농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난해부터 군의 보조를 받아 웰빙 잡곡인 콩, 감자를 재배하고 있다. 올해도 1만2천여평의 농경지에서 콩, 감자를 계약 재배했다.


윤이장은 “풍동리는 행정상 4개 마을로 구분돼 있을 뿐 실제로 한마을처럼 생활하고 있다”며 “마을의 대소사와 농사일을 함께 하고 4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한 적선계를 통해 풍동리의 농사와 관련된 일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윤이장의 설명처럼 풍동리는 각 마을을 나누지 않고 화합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풍동 3리는 거의 맞닿아 한 마을처럼 살고 있다. 대부분 각 마을마다 마을의 형국이 전해오지만 풍동 3리는 세 마을의 모습이 더해져 마을의 형국을 이룬다. 풍동 3리는 하늘을 나는 기러기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기자가 찾은 봉산마을은 기러기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고 풍동은 오른쪽 날개, 벽송은 몸통 부위다.


주민들이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날개 부위에는 살이 없기 때문에 봉산마을에서 부자가 나오지 않고 살 오른 몸통에 해당하는 벽송마을에서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 기러기 형국인 마을의 특성상 외지에 나가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속설도 함께 전해진다.


봉산마을의 유래는 마을 남쪽에 위치한 벌뫼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난 80년대 말 개간된 이후 감나무 과수원이 들어선 이곳은 벌꼬리 모양의 작은 산등성이를 이룬 곳이었다. 그래서 벌뫼등(蜂山)이란 이름에서 마을명이 정해졌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현재의 봉산(峰山)으로 변화하게 됐다.


벌뫼등은 풍동 3리를 둘러싼 용미산으로 이어진다. 용미산은 군동면 안지마을까지 길게 뻗은 능선이다. 이 산 너머에는 승천하던 용이 떨어졌다는 전설을 품은 용소천이 위치해 있다. 또 용미산은 탑골을 품고 있다. 예전 주민들이 암자와 석탑을 세우고 불공을 드렸다고 전해지는 탑골에서 도자기들이 더러 출토되기도 했다.


주민 김상칠(78)씨는 “청자인지 백자인지 알 수 없지만 도자기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탑골로 찾아들었다”며 “예전에는 좋은 도자기를 발굴했다는 말을 더러 듣기도 했었다”고 전했다.  


봉산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삶의 터전으로 이어져온 지역임을 증명하는 고인돌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2기의 고인돌이 마을에 남아 있다. 벌뫼등 우측에 위치한 주택의 장독대에 길이 2m 남짓의 고인돌 상석이 놓여 있으며 안지마을로 가는 길목의 농경지에도 고인돌 한 기가 남아 있다.
마을 곳곳에 선돌도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와 들녘에 6기 정도의 선돌이 서 있었지만 경지정리 사업과 도로 공사가 진행되면서 현재는 단 한 기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예전 주민들은 정월 대보름에 줄다리기를 한 후 그 줄을 선돌에 감아주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또 아이가 없는 동네 아낙들은 밤이면 선돌 앞에서 자식 얻기를 빌었다고도 전해진다. 


30여명의 마을 아낙들로 구성된 마을부녀회가 봉산마을의 자랑거리다. 김덕자(48)회장 등 40~50대의 젊은 부녀회원들이 10여명에 이르기 때문에 마을의 대소사에서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녀회는 마을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김회장은 “마을의 규모는 크게 줄었지만 마을을 지탱하는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며 “인정 넘치는 마을을 만드는 데 부녀회원들이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봉산마을 출신으로는 장흥 관산중학교장으로 정년퇴직한 김상철씨, 조선대학교 건축과 교수를 지낸 윤우현씨, 전남도청 건설과장을 역임한 김삼동씨, 광주에서 동성건재사를 운영했던 김경식씨, 서울 길음동 시장 대표를 지낸 김두식씨, 장성군청 토목담당으로 근무하는 김정현씨, 강진군청 친환경농산과에서 재직하는 윤경현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봉산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줄 고인돌을 찾아 벌뫼등 오른편에 위치한 홍이순(여·73)씨 댁을 찾았다. 집주인 홍씨는 이 고인돌을 ‘복바위’라고 했다. 예전 복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집안이 순탄했다는 것.

지난 3월 마흔을 넘은 광주의 큰 며느리가 늦둥이 외아들을 순산한 것도 복바위의 효험 때문이라고 홍씨는 믿는 눈치였다. 


7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고택을 지키고 있는 홍씨는 외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보낼 된장을 장만하고 있었다.

올해 100평의 밭에서 수확한 콩을 삶고 돌절구에 넣어 나무공이로 찧는 모습에 정성이 가득했다. 농촌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어진 돌절구에 대해 홍씨는 “50여년 전 나락 한 가마를 주고 구입한 돌절구”라며 “예전엔 곡식을 찧고 각종 양념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였지만 요즘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한다”고 말했다.


올해 1천700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는 홍씨는 예년만큼 수확을 얻지 못했다. 동진1호를 심었지만 병충해 피해로 수확량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홍씨는 “올해 노랑병의 피해가 커서 40㎏들이 50여가마를 수확하는 데 그쳤다”며 “자식들에게 20가마 정도 보내주고 18가마를 수매물량으로 배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홍씨는 “자식들은 농사일을 그만 두라고 하지만 식량이라도 보태주는 맛에 농사를 그만두지 못하겠다”며 “대부분의 농촌주민들이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단 직접 수확한 곡식을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재미 때문에 농사를 놓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마을에 대해 홍씨는 “봉산마을은 인근에서도 화합이 잘되는 마을로 소문나있다”며 “젊은 사람들이 마을 어른들에게 잘하고 마을 대소사에도 앞장서기 때문에 화목한 마을을 지켜가고 있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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