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포의 유래
구강포의 유래
  • 강진신문
  • 승인 2002.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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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문사고전연구소장>
구강포(九江浦)는 강진만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량, 대구, 칠량, 강진읍의 어딘가에 해당된 포구(浦口)의 명칭인 것 같은데 아직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남부에 위치한 아랍에미레이트 사람들이 6세기에 대구면의 하저쯤에 왔다 갔다」는 말과 근래에 수산업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자원으로써의 효용을 연구하는 관심가들에 의하여 강진만의 구강포도 연구의 대상에 넣어서 필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지역민들도 물어오는 일이 잦아져 그 궁금증이 더해갔다.
그래서 산(山)에 관한 기록인 산경포(山經袌)와 물(물)에 관한 기록인 수리지(水利志)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지만 신통한게 없었는데 오직 1481년에 작성된 동국여지승람이 기록의 효시인 것 같다.
그러나 최대한으로 자료를 확인하여 구십포와 구강포로 나누어 원전을 제시하고 맺는말로 마무리하여 연구자나 관심있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져 애는 써 보았다.
우선 옛자료를 살펴보자.
1) 구십포(九十浦)관련
구십포에 관련된 자료로는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1659-1674),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723-1885), 동환록(1859), 대동지지(1865), 강진현영읍진지(1871), 강진현여지승람(1895), 전라남도 강진군지(1899이후), 강진군지(1923)등이 있는데 이중에서 동국여지승람과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그리고 강진군지(1923)등의 내용만 발췌해 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세가지로 나누어 적었는데 첫째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6리에 있고, 둘째 물이 흘러오는 근원은 월출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흘러와 강진현의 서쪽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하여 「구십포」가 되고, 셋째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에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타고 온 배를 이곳에 머물렀다. 그래서 탐진(耽津) 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다.
「강진군지」 대천(大川)편에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5리에 있다. 여러 고을의 개울과 냇물들이 이 구십포에 흘러와 합하여 넓고 큰 바다로 흘러간다. 그래서 구십포라한다. 탐진(耽津)은 옛날에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때 배를 이곳의 나루에 정박하였다. 그래서 탐진이라 부르고 고을의 명칭으로 삼았다. 또 성자진(星子津)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2) 구강포(九江浦)관련
구강포에 관련된 자료는 1723년에 작성된 호남좌도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859년에 엮어진 동환록,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등이 있다.
‘정수사 여지승람’은 이웃하는 산세를 설명하는 계국(界局)편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이른바 구강포(九江浦) 30리쯤에 명산(名山)이 있다」고 한 것은 반드시 이곳 천개산(天盖山)을 두고 한 말인것같다」하다
다산의 외손자인 윤정기가 지은「동환록(東寰錄)의 강진편에 구십포는 곧 구강포(구강포)인데 남당(南塘)이라고도 한다. 강진현의 남쪽 5리에 있고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때 배를 정박하던 곧이니 곧 탐진(耽津)이라한다」고하다.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 상권에 있는 읍면의 지세와 산천편의 군동면과 대구면에 대한 설명이 있다. 군동면편은 「월출산에서 시작된 작천과 장흥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예양강의 큰 냇물이 장흥읍의 송암리 동쪽으로 합류하여 군동면의 중앙을 통과 금천, 나천, 호계, 삼신리의 큰 들판에 물을 대주고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하고, 대구면편은 「천태산에서 발원한 ‘뒷내’라는 계천은 동북에서 흘러와 대구면의 중앙을 통과하여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고 되어있다.
강진은 상고시대부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일이 생활이 된 탓으로 나주와 포구에 관련된 지명이 비교적 많다.
그래서 강진의 가장 남쪽에 있는 곳부터 포구에 관한 지명을 예로 들어보면 마량의 원포(垣浦), 대구의 구강포(九江浦), 칠량의 장포(長浦), 군동의(君令浦)와 백금포(白金浦), 강진읍의 남포(南浦), 도암의 율포(栗浦)등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구십포(九十浦)가 본래의 명칭이었는데 17세기부터 구강포(九江浦)로 불리우게 되었고 대구면 하저(下猪)에 위치한 저두산(猪頭山 347) 골짜기가 구십동(九十洞)이어서 유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탐라국 사람들이 육지로 오고갈때에 배을 대던 곳이라서 나루터의 뜻으로 성자진(星子津) 또는 탐진(耽津)이라 하였으며, 고을의 명칭도 탐진현(耽津縣 757-1417)이라 하고, 탐진현의 나루는 남당포(南塘浦)라 하였으니 지금의 남포(南浦)이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은 대구면에 있는 하저마을의 옛 명칭이 구십포(九十浦)이고 그때의 나루터는 강진읍의 남포마을로 보아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듯하다. 따라서 구십포의 영역은 대구면의 중저마을과 가우도의 동쪽부터 남쪽에 있는 백사 마을까지가 될 것 같다.
이상의 예로 보아서 구십포의 물은 칠량면의 장계, 구십동계곡, 항동의 여섯 골짜기물, 청용 관찰봉 정상에서 발원한 물들이 합해서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항구의 기능, 어족 자원보호, 기르는 어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가꾸어서 삶이 윤택하게 함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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