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조각장식 향로 고찰
청자조각장식 향로 고찰
  • 강진신문
  • 승인 2002.08.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승창(호암미술관 선임연구원)
고려청자 중에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대접이나 접시와 같은 일반적인 용기 이외에 당시의 국교였던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다수 알려져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유물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청자향로뿐만 아니라 고려청자의 성격이나 특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자향로는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한 종류로서 외형상의 특징만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왔을 뿐, 유물과 관련된 연구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조각장식 향로는 관련기록이 극히 드물고 현재 전하는 유물의 수가 적어, 구체적인 특징이나 변화과정을 밝히고 정확한 제작시기를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요지 발굴에서 출토되거나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파편을 통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장식이 점차 변화되고 향로의 제작도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향로의 조형을 중국 청자향로와 비교하여 검토하였는데, 몸체의 형태와 전체의 구조는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동물모양의 다양한 조각은 당시 고려에서 유행하던 금속장식 등에서 일부 채택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특히 강진 용운리 10호 요지에서 출토된 향로의 특징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함께 출토된 완과 같은 파편들은 형태나 장식소재․장식구성․장식기법 등이 중국 요주요 청자와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고려와 중국 청자의 영향관계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둘의 비교를 통하여 청자향로의 제작시기와 강진 용운리 10호-Ⅱ층 퇴적의 형성시기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요주요 출토품과 비교하면 용운리 10호-Ⅱ층 퇴적은 빨라야 11세기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많으며, 조각 향로는 11세기 후반부터 사당리 7호와 8호 요지가 운영되던 1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조각장식이 있는 청자향로는 불구(佛具)로서 뿐만 아니라 12세기 전성기 청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청자향로는 용운리뿐만 아나라 사당리에서 더욱 많은 수가 출토되거나 발견되었다. 사당리는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12세기의 비색청자를 제작하던 요지가 밀집해 있으며,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유물이 만들어진 곳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 조각장식 향로는 모두 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당리에 산재해 있는 몇몇 요지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에서 청자기와편과 함께 여러 점의 향로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뚜껑이나 조각장식 등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부의 특징이 조금씩 다른 괴수장식의 받침파편이 확인되었다(圖31). 그러나 출토품을 통해 향로가 제작되었던 것이 입증되었을 뿐 유물의 특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고되지 않았으며, 현재 알려져 있는 자료로 볼 때 향로의 파편은 용운리 10호나 현재 알려져 있는 유물과 동일한 종류인 것은 분명하다.
고려청자는 형태․장식․장식기법․제작방법 등에서 초기부터 중국청자와 밀접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고려후기까지도 영향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초기와 후기의 영향관계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지만, 전기와 중기에 대한 조사와 검토는 매우 부진한 상황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사찰이나 건물지 혹은 묘지에서 중국 송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중국 자기파편이 출토되고 있으며, 강진 등의 요지 발굴품이나 전세품 중에도 요주요 등의 출토품과 유사한 예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고려와 중국 청자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자기의 교역상황이나 수요성향, 제작배경 등을 추정해 볼 수 있고, 향후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고려청자의 특징이 더욱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