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군동 관덕마을
[마을기행]군동 관덕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02.27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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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외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조금 감돌 뿐 포근함이 느껴지는 한낮의 기온은 새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 황량하던 산야도 새 생명으로 기지개를 켜듯 차츰 푸름을 되찾아가고 부지런한 농군들은 벌써부터 한해 농사를 준비하기에 분주하다.


강진읍에서 마량방면으로 가다 군도 14호선으로 접어들면 관덕교를 지나 군동면 쌍덕리 관덕마을이 나타난다. 군도 14호선을 중심으로 윗관덕과 아랫관덕으로 나누어지는 마을은 현재 60여호 10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곡부공씨가 처음으로 마을에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지나 현재 자세한 내력은 남아 있지 않다. 16세기 언양김씨가 마을로 이거해 왔으며 이후 청주김씨, 창녕조씨, 연안차씨, 장흥장씨 등이 옮겨오면서 관덕마을을 형성했다. 


관덕마을은 같은 법정리에 속하는 평덕마을과 함께 상평덕리에 속해 있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뒤편의 언덕이 활과 같이 휘어져서 활 형국이라고 하여 마을을 끼고 흐르는 금강천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활줄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활 형국에서 마을의 지명도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예기에 나오는 ‘사이관덕(射以觀德)’이란 문구에서 마을명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사이관덕이란 활을 쏘면서 덕을 본다는 뜻으로 활을 쏘는 것은 평화시에 심신을 연마하고 유사시에는 나라를 지키는 까닭에 이를 보는 것은 덕행을 보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랫관덕에 위치한 사이제도 마을의 지명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1899년 중수된 것으로 알려진 사이제는 서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건립된 곳. 이곳은 언양김씨, 창녕조씨, 흥덕장씨, 청주김씨, 연안차씨 등이 중심이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인근 마을인 평덕, 덕천, 하신, 금사, 덕마 등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학에 능한 선비가 한문과 예절교육을 실시했다. 지난 60년대까지 사이제는 서당으로서 기능을 하다가 한학을 배우려는 주민이 차츰 줄어들면서 폐쇄된 상태로 현재 건물만이 보존돼 있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관덕마을 곳곳에 정겨운 지명이 남아있다. 곡부공씨가 처음 터를 잡아 생활했던 장소인 감상골, 마을 앞쪽에 위치한 들녘으로 예전 대나무가 무성했던 등성이란 의미에서 일컬어지는 대산맹, 마을 북쪽에 있는 소인 바래미소,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감상골에서 옮겨 새롭게 생긴 마을이란 뜻의 새터 등의 지명이 주민들 사이에 구전돼 오고 있다. 대산맹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군이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던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사장나무 두 그루가 보존돼 있다. 아랫관덕과 윗관덕에 각각 한 그루의 팽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윗관덕에 위치한 사장나무는 수령 300년을 넘겼으며 아랫관덕 사장나무는 수령 130년 정도로 추정된다.


금사저수지에서 시작해서 강진만으로 흘러가는 관덕천은 마을의 운치를 더한다. 지난 2003년 제방유실예방정비사업을 거쳐 친환경적인 하천으로 가꾸어진 관덕천은 주민들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있다.
마을을 둘러보다 10년간 이장을 역임한 조영화(65)씨를 만나 관덕마을의 자세한 내력을 들었다. 조씨는 금호고속의 전신인 광주고속에서 근무하던 지난 92년 서울~강진 고속버스를 개통시키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으며 초대 광주고속 강진영업소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 95년부터 마을이장을 역임했던 조씨는 “주민들의 성품이 소박하면서 인심이 좋아 마을대소사에 한 가족처럼 상부상조한다”며 “웃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 사상도 남다른 마을”이라고 마을자랑을 했다. 관덕마을에는 마을청년회가 주축으로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주민과 출향인사들이 마을회관에 한데 모여 합동세배를 하고 떡국을 함께 나누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고 조씨는 덧붙였다. 


마을주민 김철(82)씨는 마을 서당인 사이제에 대한 내력과 함께 서계에 대한 설명을 더했다. 서계는 사이제로 모여든 학자들이 한학을 공부하면서 상부상조하기 위해 조직한 민간조직으로 현재까지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김씨는 “인근에서 가장 오랜 동안 서당이 운영됐으며 아직까지 서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며 “훼손된 채로 남아있는 사이제를 보수해서 마을의 유산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관덕마을은 지난 98년 여름퇴비증산운동으로 전남도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강진군에서 최우수마을로 선정됐다. 또 지난 97년 마을부녀회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호박을 재배해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주민들은 미맥농사에만 머물지 않고 장미, 버섯 등 특화작물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관덕마을 출신으로는 전남도청 산림과장을 역임한 김영환씨, 경기기능대학 학장을 지낸 장원종씨, 해남, 강진세무서 과장을 역임한 김현씨, 강진경찰서 정보과장을 맡고 있는 이완진씨, 광주 두암파출소 소장으로 근무하는 조광술씨, 군동농협에 재직하는 조창신씨, 강진읍에서 강진원예사를 운영하는 김대용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웃관덕에서 금사저수지로 가는 마을안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마당에 심어진 감나무를 손질하고 있던 주민 장영묵(73)씨를 만났다. 장씨는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서 땔감으로 쓸 요량이었다.


24년전 인근 월봉마을에서 옮겨왔다는 장씨는 “관덕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월봉마을로 이사해서 40여년을 살다가 이곳으로 되돌아왔다”며 “여느 농촌마을이 대부분 그렇듯이 예전에 비해 마을의 규모는 크게 줄었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인정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장씨는 “주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잘못된 일은 덮어주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며 “뒤에서 흉보는 일도 없이 서로 합심하며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덧붙였다.


예전 마을의 생활에 대해 장씨는 “목리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마을과 가까운 백금포 나루터를 통해서 강진읍을 오가곤 했다”며 “인근 야산에서 베어낸 나무를 장에 내다팔기 위해 강진만을 수없이 건너다녔다”고 회상했다.


3남1녀의 자녀를 둔 장씨는 “농한기에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의 집을 오가기도 한다”며 “자식들이 함께 살자고 하지만 며칠만 서울에서 생활해도 답답한 마음 때문에 금방 마을로 내려오곤 한다”고 말했다. 또 장씨는 “심심할 때면 자전거를 타고 들녘을 돌아보기도 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을이 맘 편한 곳”이라며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주민들이 있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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