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칠량 운산마을
[마을기행]칠량 운산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02.0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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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시샘하는 동장군이 갑작스레 기승이다. 한동안 포근하던 기온은 순식간에 곤두박질하며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한다.


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귀성객들로 북적였던 각 마을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한적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귀성객을 환영하는 문구를 담은 현수막만이 아직까지 곳곳에 내걸려 지난 명절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칠량면소재지에서 칠량초등학교 앞을 지나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찾은 곳은 칠량면 운산마을. 면소재지의 주산인 호암산 자락에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한 운산마을은 인근 연곡, 영계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 영동리 앞들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마을이다. 뻥 뚫린 마을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철에는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뱀이 엎드려있는 모습이라 전해지는 일명 복사동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룬 운산마을은 구름 속에 달이 숨어 있는 형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런 마을의 형국을 바탕으로 현재의 마을명도 정해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운산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된 칠량면 28개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칠량면 40개 마을 중 한 마을로 기록돼 있다.


마을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전에는 현재의 마을 위치까지 바닷물에 잠겨 있었으며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간척지가 생겨나면서 농경지를 따라 농가가 증가하고 운산마을이 형성됐다. 이를 증명하듯 복사동 옆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메어두었다고 전해지는 배멧부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 뒤편으로 호암산이 위치해 있고 앞쪽으로 바다가 있었던 자연환경 때문에 운산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장소다. 마을 곳곳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산재해 있었다. 특히 복사동 근처에 10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경지정리로 파괴되거나 땅 속에 파묻혀진 상태다.

또 평평한 책상과 닮았다고 하여 부른 책상바위, 한반도의 모습을 닮은 지도바위, 거북과 흡사한 형상을 띤 남생이바위 등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있었지만 원형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는 차씨들이 터를 잡고 거주했던 마을에서 따온 차동, 운산마을과 영동마을 사이의 들녘을 일컫는 줄아들, 마을 앞쪽의 들녘을 지칭하는 번짓들, 인근 신암마을과 경계가 되는 들을 말하는 굽은서리들, 예전 서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서당터, 복사동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 장례 풍습에 따라 초분을 지었던 골짜기인 초분골 등의 지명이 주민들 사이에 구전된다.   

 
미맥농사에서 대부분의 소득을 얻고 있는 운산마을은 이렇다할 시설작물이 없다. 마을의 1농가에서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요즘은 말 그대로 농한기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지난 2002년 신축된 마을회관은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동장군의 위세가 꺾이지 않은 바깥 날씨와는 달리 10여명의 주민들이 모인 마을회관 안은 훈훈한 온기로 넘쳐났다. 주민들은 설에 장만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바쁜 농사일을 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민 윤순임(84)씨는 “명절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생활하는 자식들이 모여들면서 모처럼 마을에 활기가 넘쳐났다”며 “60세 넘는 주민들이 마을을 지켜가고 있지만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다”고 말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만호(61)이장은 자세한 마을소개를 더했다. 김이장은 “한때 2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생활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35호 7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며 “70세를 넘는 주민들이 40명에 이를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이어 김이장은 “오랜 세월 정을 쌓아온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단결심이 좋은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며 “인심 좋고 심성이 착한 마을로 이름나 있다”고 덧붙였다.


운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2곳에는 마을출신 김현장씨가 세운 마을표지석이 있다. 지난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씨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남다른 애향심을 나타냈다.


현재 광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씨는 지난 98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한시를 마을표지석에 새겨 기증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벚꽃나무 200그루를 마을에 전달했다.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 입구 2곳에 나눠 심은 벚꽃나무는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려 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운산마을 출신으로는 한국방송공사(KBS) 프로듀서로 근무하는 김광필씨,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노상훈씨, 삼성그룹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강진석씨, 광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박상표씨,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는 김원호씨, 경북 진천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는 유상석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쌀쌀한 날씨 때문인 지 더욱 한적한 마을을 둘러보다 면소재지에서 돌아오던 유훈옥(71)씨를 만났다. 유씨는 6개월 전부터 발병한 신경통 치료를 위해 강진읍에서 한방진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씨는 “평생 병원을 모를 정도로 건강하다고 여겼는데 오른쪽 허리에서부터 발목까지 통증이 생겨 한방치료를 받고 있다”며 “얼마간 침을 맞고 한약을 복용하면 차도가 있을 거라는 말에 다소나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유씨는 6마지기 논농사와 함께 결명자를 재배하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한 결명자가 수매제폐지로 쌀값이 하락하는 요즘에는 큰 소득이다. 유씨는 “벼는 평당 3천원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지만 결명자는 평당 4천원의 소득이 되고 있다”며 “600평의 밭에서 보리를 수확한 후 파종한 결명자는 가을에 거둬 비교적 좋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유씨는 “결명자를 말려 씨를 떨어내기 위해 일손이 필요하지만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며 “넓은 평지에 잘 말린 결명자를 깔아놓고 그 위를 트랙터로 수차례 왕복하면 수월하게 씨를 떨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을 소개를 부탁하자 유씨는 “추곡수매를 마치고 나면 주민들이 면소재지에서 술판을 벌이기도 하지만 소란을 피운 일이 한번도 없었다”며 “법 없이 살 만큼 선량한 동네로 인근에서 알아줄 정도”라고 자랑했다.  


올해 소망에 대해 유씨는 “이번에 신경통으로 고생을 해보니 건강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며 “올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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