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신전 백화마을
[마을기행]신전 백화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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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면소재지를 지나 해남 북일면을 잇는 도로를 따라 면의 끝자락에 위치한 용화리 백화(柏花)마을.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이고 앞으로 넓은 농경지를 품고 있는 백화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마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주작산에서 이어온 준봉과 멀리 해남 두륜산 천왕봉이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위엄있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동백꽃이 활짝 피어있는 형국이며 실제로 동백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란 마을명이 정해졌다고 전해진다. 또 마을에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던 왜병이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모두 베어버린 마을의 동백나무 숲을 이후 백화라고 일컬었다.


마을의 유래를 짐작케 하는 장소로 도강김씨 문중서당인 백화정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숙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화정은 문중을 중심으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장소였다. 이곳 뒤편에는 문중 제각인 영사정이 위치해 있다. 백화정 앞 정원에는 수령 수백년을 넘긴 동백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또 이곳의 이름을 따와 마을 이름을 정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으로 보존되고 있다.   


지난 60년대 초까지 마을의 서당으로 활용된 백화정에서 많은 문인재사가 나왔고 개화기 이후에는 교육자, 서예가, 공직자 등 다양한 인재가 배출됐다. 마을 출신 중 유독이 공직자가 많은 이유도 예로부터 백화정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민들의 교육열 때문인 것을 쉽게 추측케 한다.


현재 35호 80여명의 주민들이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마을은 도강김씨 집성촌을 이어오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도강김씨이거나 친인척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마을보다 단합이 잘된다. 지난 80년대에는 범죄없는 마을과 경로효친 시범마을로 지정될 정도로 전통적인 예법과 질서를 지켜가고 있는 마을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답게 곳곳에 주민들의 삶의 흔적을 담은 지명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는 뒤주를 가득 채워줄 정도로 기름진 논을 의미하는 뒤주강, 말을 매었던 곳으로 큰 말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몰뫼등, 인근 용정마을로 가는 길로 빛이 가려진 곳이란 의미를 지닌 빛갈이, 백화정 주변을 일컫는 서당골, 작은 크기의 논들이 모여 있는 곳인 함지등,  도강김씨가 처음 터를 잡은 곳으로 전해지는 앞개, 마을앞 황무지로 주민들이 모여 놀던 장소인 번덕지, 마을 아이들이 공차기 등을 하며 놀던 논인 짱밧등논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지난 83년 인근 신정마을과 분리되기 전까지 100호 남짓의 큰 마을이었던 백화마을은 비옥한 농토를 바탕으로 부촌을 형성했다. 벼농사 외에 고추, 마늘, 고구마가 마을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황토밭에서 생산된 고추를 햇볕에 건조시켜 판매하는 태양초는 도처에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87년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으로 설치한 방앗간에서 마을부녀회가 태양초를 직접 분쇄해서 고춧가루로 판매할 정도였다. 또 지난해 5월 신전면과 자매결연한 광주 상무1동 주민들에게 지역 특산물로 소개되면서 지속적인 주문이 들어올 만큼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을 통해 마을에 대한 얘기를 더욱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17년간 마을이장을 맡아왔던 김재성(70)씨는 “마을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마을이었다”며 “외부에서 초빙한 훈장이나 학식 깊은 마을주민이 인근 마을 아이들까지 교육을 책임졌다”고 회상했다.

함께 있던 주민 김규욱(70)씨는 “주민들 대부분이 친척관계를 이뤄 단합이 잘되는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며 “정월 대보름이면 모든 주민들이 한데 모여 농악놀이를 즐기고 신파극을 공연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청년들이 틈틈이 연습한 신파극을 매년 대보름에 주민들에게 선보였으나 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중단됐다.      


백화마을에는 ‘백화팔경’이란 시가 전해오고 있다.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마을 주변의 명승경관을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시다. 백화마을과 인근 신정마을에 위치한 계두산, 병풍바위, 앞개, 백화정 등을 노래하고 있으며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백화마을 출신으로는 강진향교 전교와 강진군 노인회장을 지낸 김정진씨, 광주체신청 서무과장으로 퇴직한 김응진씨, 영광군청 부군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병진씨, 나주에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형섭씨, 강진군산림조합장을 지낸 김원진씨, 해남경찰서에서 경감으로 퇴직한 박재복씨, 영광경찰서 형사반장을 역임한 김규상씨,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김숙씨, 나주종합병원 정신과 의사로 재직하는 김익진씨, 서울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김민석씨, 경남 진주에서 김피부과 의원을 운영하는 김형균씨, 영광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김희진씨, 대한지적공사 광주지사에서 재직하는 김우현씨, 강진군청 재무과에 몸담고 있는 김재현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광역상수도 공사가 한창인 마을 안길은 어수선하다. 상수도관을 매설하고 갓 포장을 마무리한 길을 따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마을주민 김순영(74)씨를 만났다. 김씨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마당에서 금이 가거나 깨진 부분에 시멘트를 덧발라 보수하는 작업을 금방 끝낸 참이었다.


백화마을에서 계속 생활해온 김씨는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강진군에서 알아줄 정도로 부촌을 이뤘던 마을”이라며 “신정마을과 분리되고 젊은이들이 외지로 많이 나가면서 마을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주민들이 대부분 집안사람이다 보니 마을 대소사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한다”며 “단합심 좋고 서로간의 인정 넘치는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농사에 대해 묻자 김씨는 “지난해는 벼멸구 때문에 욕받제”라며 “수확량이 평년작보다 30%정도 줄어든 것 같다”고 답했다. 20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씨는 지난해 벼 40㎏ 50가마를 공공비축미로 수매하고 농협을 통해 110가마를 판매했다. 김씨는 “한 가마당 1만원 이상 가격이 떨어져 150만원 정도 수입이 줄어들었다”며 “농기계 사용료, 인건비 등은 갈수록 올라가는 상황에서 남는 것이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3남1녀의 자녀를 둔 김씨는 “종가집이다 보니 명절이면 외지에서 생활하는 자식들이 모두 내려와 집안에 활기가 넘친다”며 “올해도 가족들이 건강하게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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