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 군동 동동마을
[마을기행] 군동 동동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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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을 앞둔 한겨울의 추위가 매섭다.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고 했던가. 20여일 쏟아지던 폭설이 휘몰고 지나간 다음 찾아온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며 옷깃을 바짝 여미게 한다.


면소재지에 인접한 군동면 동동마을은 비파산의 동쪽 줄기에 안겨 50여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득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삼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져 있고 마을 앞으로 널찍한 들녘이 펼쳐져 전형적인 농촌의 정취를 자아낸다.


비파산 아래 위치하면서 탐진강과 인접한 마을은 일찍이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산야에서의 수렵과 탐진강에서 풍부한 어패류 채취가 가능했던 자연환경을 가진 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삶의 터전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마을 곳곳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군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문헌상 동동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에 라천면의 3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처음 기록돼 있다. 라천면의 소재지였던 시목마을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동동마을이란 마을명이 정해지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벼농사로 생활해온 이유로 마을에는 농경지에 관련된 지명이 많다. 보리를 많이 심어 겨울이면 까마귀 떼가 많이 몰려든다고 해서 부른 가마귀배미, 가오리와 비슷한 모양을 한 데서 비롯된 가오리배미, 거미줄에 바람이 새듯이 물이 빠져 버린다는 의미의 거무배미, 돌이 많은 농경지란 뜻의 독배미 등이 있다. 또 눈깔배미, 돌논, 감냉기들, 복새배미, 숭어배미, 진배미 등 농경지의 모양새와 특성에 따라 각각 불리는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에는 향토색을 물씬 풍기는 지명도 곳곳에 전해진다. 마을과 시목마을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샘골물과 시목제의 물이 합류하는 곳으로 예전 소달구지의 움막을 지어 사용했던 데서 유래한 구루마똘, 마을의 공동샘으로 이용했던 동동샘, 밭이 길게 있는 것처럼 등성이가 길게 늘어선 모습에서 일컬어진 장밭등재, 장밭등재에서 시작된 물이 내려가는 얼굴똘 등이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고 있다.


벼농사 위주의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동마을은 요즘 말 그대로 농한기철이다. 마을의 농경지가 대부분 진흙땅으로 벼 이외에 다른 작물의 재배여건에 맞지 않기 때문. 지난 80년대 딸기, 오이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물빠짐이 좋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맘때 마을회관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한다.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함께 해먹고 정담을 나누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박희주(65)이장은 “마을 주민들의 단합이 잘되고 인심 좋기로 소문난 마을”이라며 “농한기에는 거의 모든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식도 함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한데 모아놓고 농사철이 시작되는 3월까지 마을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쌀과 밑반찬이 모두 바닥나면 또 주민들이 각자 낼 수 있는 양만큼을 한데 모아 마을회관에서 함께 쓴다는 것.


주민 김기현(75)씨는 “일제시대부터 동동마을에서 나오는 쌀의 미질은 인근에서 알아줄 정도였다”며 “해남에서 온 쌀장사들도 동동쌀하면 서로 가져가려고 할 만큼 간척지쌀에 못지 않은 밥맛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다. 마을의 토양은 다른 작물의 재배에는 맞지 않지만 미질이 우수한 쌀을 생산하는 데는 최고의 조건이라는 것. 주민들은 같은 품종이라도 마을에서 재배한 쌀이 훨씬 찰진 밥맛을 나타낸다며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동동마을은 지난 2001년부터 친환경농업을 시작했다. 현재 6㏊의 면적에서 우렁이농법을 시행하고 있다. 15농가가 친환경농업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난 2004년에는 무농약인증까지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벼멸구의 갑작스런 출몰로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사용하게 되면서  친환경인증을 따내지 못했다.


주민 서충식(66)씨는 “벼농사에 생계를 걸고 있는 주민들이 좀더 나은 소득을 위해 친환경농업을 시작했지만 판로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주민들이 친환경농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정책적인 배려가 뒤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동마을 출신으로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송기영씨, 국가정보원 이사관으로 근무하는 송광종씨,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김광영씨, 무안우체국장으로 퇴직한 송윤종씨, 선구식품을 경영하는 송기평씨, 목포 제일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재영씨, 군청 열린민원과장을 맡고 있는 송기훈씨, 대구면사무소 산업담당으로 근무하는 송기출씨, 성요셉여고 미술교사로 있는 송철종씨, 영암 덕진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송후용씨, 광주에서 교직에 있는 송길화씨, 수원에서 초등학교 교감을 맡고 있는 박병동씨, 광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송달종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군동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다 마당에 놓인 화덕에 군불을 때고 있던 이주영(63)씨를 만났다. 이씨는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염소 뼈를 고아내는 중이었다.


15년전 고향인 군동면 평리마을에서 옮겨온 이씨는 “닭을 키워볼 생각으로 축사를 구입한 후 동동마을로 이사했다”며 “3월부터 8월까지 삼계 6만여수를 위탁사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닭 사육농가가 증가하면서 수익이 예전만 같지 않다”며 “초창기에는 마리당 200원 정도의 비용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50원이 떨어진 가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닭 사육과 함께 1만1천여평의 농사를 짓는다는 이씨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주민들에게서 임대를 받아 8천여평을 경작하고 있다”며 “지난해는 멸구 피해가 많아 예년보다 수확이 줄어든 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57가마를 농협에 수매하고 일가친척들의 소개를 통해 대도시로 판매한 양이 많았다”며 “쌀 가격이 가마당 1만원 가량 떨어져 이래저래 손해가 크다”고 푸념했다. 또 이씨는 “비료값, 농약대, 인건비 등 영농비용은 갈수록 올라가는데 쌀값만 하락하고 있어 농민들의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다”며 “영농비용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비료값, 농약대의 지원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마을에 대해 이씨는 “60대 이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서로 믿고 양보하는 미덕을 갖고 산다”며 “개인의 이익보다 서로 협동하는 것을 우선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내 일처럼 함께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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