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옴천 사동마을
[마을기행]옴천 사동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6.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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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이 온통 산이 둘러싸인 옴천면 사동마을은 관내에서도 두 번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오지마을로 통한다.

인근 좌척마을에서 골짜기를 따라 2㎞ 정도를 계속 올라가면 비로소 사동마을이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92년 오지개발사업으로 확포장된 진입로는 흡사 뱀의 모습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새를 그리며 사동마을로 이어져 있다.


마을의 형국이 뱀과 같다 하여 명명된 사동마을은 이름에 얽힌 다양한 얘기를 담고 있다. 예전 마을명을 사동이라 칭하면 마을에 해가 있다는 말에 따라 마을 입구에 있던 사두석을 없애고 용동으로 개칭하였으나 마을의 세가 갈수록 축소되면서 다시 사동으로 바꿔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또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고려 인종때 난을 피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해주오씨가 마을 주변에 뱀이 우글거리는 꿈을 꾼 후 마을 이름을 사동이라 부르고 살다가 마을의 규모가 100여호로 커짐에 따라 용으로 승격시켜 용동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다시 마을세가 약해져서 원래의 사동으로 고쳐 불렀다.  


마을의 유래처럼 곳곳에 뱀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다. 뱀이 엎드려 있는 형국을 하고 있는 골짜기인 복사골, 작천면 학동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인 배암골, 뱀머리 형국의 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두머리 등의 지명이 있다.


한때 100여호를 넘는 마을을 이루기도 했던 사동마을은 현재 20여호 30명 남짓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마을의 세가 약해진 이유에 대해서도 2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마을의 뱀형국과 관련된 얘기도 있다. 예전 사두머리에 뱀머리 형국의 돌이 있었고 바로 앞에 먹이에 해당하는 머구리(두꺼비)바위가 있었지만 농사에 지장을 준다고 머구리 바위를 깨버린 강씨는 폐가하고 마을의 세도 약해졌다.


또 다른 얘기는 마을 뒷산 느티나무에 얽힌 내용을 담고 있다. 마을의 부흥을 위해 심은 뒷재사장나무라고 불리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일제 시대 공출을 우려해 마을에서 이 나무를 자르고 난 후 마을세력이 약해졌다는 것.


휴대전화도 불통될 정도의 깊은 산중에 자리한 사동마을은 지난 폭설 때문에 하루 2회 왕복하던 버스마저 20일 이상 끊긴 상태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는 온통 빙판길로 변해 차량의 오고감이 쉽지 않았다.


한기가 기승을 부르는 날씨였지만 주민들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은 훈훈한 온기가 먼저 느껴졌다. 마을회관에서 10여명의 주민들이 윷놀이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배명진(71)이장은 “워낙 오지여서 교통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단합 잘되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마을”이라며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없고 서로 인정을 나누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자랑처럼 사동마을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지정한 범죄없는 마을이다.


주민 이경재(74)씨는 “2개군 4개면에 걸친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다”며 “주민들의 농경지가 영암군에 닿아있고 옴천, 성전, 작천쪽으로 농경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작천면 학동마을에 약 5㏊의 농경지가 있지만 농로가 비포장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여름철 폭우가 쏟아지면 경운기조차 다니지 못할 정도로 영농조건이 열악한 상태다. 주민들은 학동마을로 이어진 농로에 포장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10여년 전까지 마을 전체에서 100두가 넘는 한우를 사육하기도 했으며 한우를 키우지 않는 집을 없을 정도였다. 언덕이 많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는 쓸 곳 많은 영농수단이었다. 집집마다 물건을 나르는 데 소달구지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지난 85년 마을에 처음으로 경운기가 들어오고 모든 집에 보급되기 전까지 소달구지는 주민들의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마을에는 예전에 쓰던 소달구지를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는 집이 있을 정도다.


주민 김병용(75)씨는 “주민수와 마을에서 키우는 소 마리수가 같다고 할 정도로 집집마다 한우를 키우지 않는 집이 없었다”며 “갑작스런 소값 폭락으로 대부분 한우사육을 포기하고 현재 3농가가 10마리 남짓의 한우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산 깊고 골 많은 사동마을은 피난처로 세 차례 이용될 자리라는 말이 전해온다. 주민들에 따르면 사동마을은 구한말 동학군들의 피난처로 쓰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피난처로 이용됐다. 언제 다시 피난처가 쓰일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산골 깊이 위치한 마을의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사동마을 출신으로는 20대 옴천면장을 지낸 이호재씨, 서울 서대문세문서에 근무하는 김영흥씨,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이철재씨,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채정석씨, 농협중앙회 목포지점에서 재직하는 장명성씨,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이금아씨, 서울 주택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장경배씨, 경기도 안양시 부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경숙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쌓인 눈을 헤치고 뽑아온 배추를 일일이 손질하고 있던 안복희(여·59)씨를 만났다. 안씨는 “김장김치를 담고 남은 50여포기의 배추를 그대로 놔둘 수 없어 뽑아왔다”며 “깨끗이 손질한 후 절여서 김치를 담지 못한 주민들과 함께 나눌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안씨는 “눈밭에서 배추를 뽑아오기는 올해가 처음”이라며 “모든 주민들이 올해처럼 폭설이 쏟아지기는 평생 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병영면 지로리가 고향인 안씨는 “사동마을로 시집온 지 어느덧 47년이 흘렀다”며 “그 당시만 해도 마을의 위치가 어딘 지 모를 만큼 산골 깊은 마을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안씨는 “마을 진입로가 포장되지 않았을 때에는 택시기사들도 마을로 들어가기를 꺼려했다”며 “짐을 싣고 마을로 들어오면 차량의 하부가 바닥에 닿기 때문에 짐만 택시로 보내고 사람은 걸어서 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40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는 안씨는 “400가마 정도를 수확해서 곡수와 식량으로 쓸 100가마를 제외하고 300가마를 판매했다”며 “가마당 1만원 이상 가격이 떨어져 지난해보다 300만원 정도 수입이 줄었다”고 말했다.
새해 소망에 대해 안씨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한해를 보내는 것말고 무엇이 중요하겠냐”며 “아직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아들이 새해에는 짝을 찾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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