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는 비장네 집
헐리는 비장네 집
  • 강진신문 기자
  • 승인 2002.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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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없던 집을 짓고, 서로 살려고 하는 집은 사들여 오려고 하는게 당연할 텐데 지금 읍내 서문안 비장네 집이 헐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만감이 교차된다.

가난한 사람은 배부른 소리로 여길 테고 가진 사람은 내 일이 아니니까 라고 있겠지만 옛말처럼 인장지덕이요 목장지대 즉 큰 사람의 덕은 보아도 큰 나무의 덕은 보기 어렵다는 것처럼 선현의 큰 은혜덕을 입어서 살기 좋은 서강진 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그분들이 사시던 자취마저 허물게 되었으니 글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써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다른말이 아니라 돈만 있으면 될 일인데 멍청한 돈이 없어서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하는 자괴감때문이다. 나 개인이 겪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모두에게 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몇 가지 일화를 적어 보려고 한다.

지나간 70년대 말 어느날 영랑 김윤식 선생의 여동생의 남편이 되는 벽산 김창식 선생님을 모시고 도암면 귤동 낙천 윤재찬 선생님댁엘 찾아갔다가 볼일이 끝나 걸어서 읍내까지 나온 일이 있었다.

그때에 해창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논 두둑이 둥그렇게 되어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저곳은 김비장이 바다를 막아 주민들에게 나누어준 곳이다 라고 하시면서 「옛날의 부자들은 없는 일거리를 만들어서 주민들이 품을 팔아 먹고살게 해주고 그 일이 완성되면 다시금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여 존경을 받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 이익만 볼려고 하게 되어 인정이 메말라 간다」고 하신적이 있다.

그후 도자기로 소문난 이천에 간적이 있는데 “고려청자의 본고장에서 왔다고 특별히 대접한다“면서 이름도 모른 집으로 데리고 갔다. 잠시 후 그 집 주인이 나와서 어디서 왔느냐기에 「전남 강진」에서 왔다하자 ”오늘 저녁은 귀하신분들을 모시게 되었으니 다른 손님은 받지 않을 테니 문을 닫으라“고 하는게 아닌가.

필자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보통의 사람일뿐 권력, 배움, 돈, 나이, 아무것도 다를 바 없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당신들의 고향 사람인 황씨의 도움을 받아 돈도 벌고 오늘이 있게 되었는데 마침 황씨의 고향후배가 왔으니 대접하기위해 하루저녁 장사를 안한다고 굶어 죽겠느냐?” 고 하면서 정담으로 밤을 지샌 적도 있다.

다음으로 80년대 초에 나주시에 있는 활쏘는 곳에 갈 일이 있었다. 그때에 건물 안에 들어서자 낯익은 글씨가 걸려 있기에 가까이 가서보니 소죽(고 김현장선생의 호)선생의 친필이어서 책임자에게 물었더니 자기들이 존경하는분 이라고 하였다. 이유를 알바 없이 존경한다는 대답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즉 비장의 손자가 소죽인데 이분의 집안은 시인으로 영랑, 현구등이 있고 독립운동가로는 김안식, 김현봉씨등이 있으며 교육분야에는 금릉여중을 세운 김안식등이 있으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집이냐는 뜻이였다.

위에 열거한 이들은 강진역사의 큰 획을 긋는 큰 인물들인데 아직도 그들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소죽 개인으로 말하자면 청자축제가 있게 해준 한 분이며 일본 신사당을 없애고 동쪽을 향하여 매일 활로 쏘면서 나라위한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선인봉에다 양무정을 세웠으며 근세의 강진 서도를 이끌어온 70년말 까지의 문화인이기도 하다.

생전의 6~7년간 지근에서 모셨지만 한번도 자기가 살아갈 걱정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제 우리가 할일은 어진이를 잘 받들고 그들이 살았던 자취를 가꾸며 남긴 유훈을 잘 이어서 지역을 발전 시켜가야 될 일인데 그런 일들이 잘 안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정성을 모아 산을 구입하여 공유화하는 일도 하던데 70년대까지는 서 남해권에서 가장 잘 나가던 강진이 어쩌다가 제 길을 못가고 안타까운 일만 생겨나는지 우리 모두가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 정답은 아마도 옳은 일을 아니해서 생긴 일이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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