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작천 신기마을
[마을기행]작천 신기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5.08.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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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촉촉히 내리는 빗방울이 가을을 재촉한다. 숨막힐 듯한 열기를 내뿜던 한여름 바람과는 달리 빗방울과 함께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서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실감케 한다.


작천면소재지를 지나 백련으로 유명한 용동저수지를 끼고 5분 정도 차를 몰아 찾아간 곳은 작천면 신기마을. 예전 역터로 전해지는 마장등과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언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이 생기면서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죽산마을은 고을터요, 신기마을은 말을 바뀌어 타던 동역터’라고 한다.

역이 위치했던 마장등에서 지금까지도 기왓장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말에게 물을 먹였던 샘 등이 역터의 흔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이 폐지되면서 마을도 함께 폐촌되었으나 300여년 전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었고 새로운 터를 잡았다는 뜻에서 마을명이 ‘신기(新基)’로 정해졌다.


마을 곳곳에 밀양 손씨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 가장 먼저 입촌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평산 신씨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을 이뤘으며 현재 40여호 70여명의 주민들이 고향을 지켜가고 있다. 


신기마을에는 요강 모양으로 생긴 밀양 손씨의 선산인 요강등, 인근 부와마을과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뱀처럼 길게 생긴 등이라 일컬어진 진등, 뒷산과 마을과의 맥을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놓은 것으로 전해지며 6~7개의 바위가 고인돌처럼 남아 있는 바우백이밭, 빨래를 했던 샘인 서답새암, 서답새암에서 150m정도 떨어져 있는 샘으로 말에게 물을 먹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말새암, 병영 중가마을로 가는 등성이로 배의 노처럼 생겨 불리는 요등, 촛대처럼 뾰족하게 생긴 모양새 때문에 일컬어진 촛대봉, 옴천과의 경계에 위치한 모장등, 소나무가 무성했던 습지인 송골 등의 정겨운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마을회관 앞 공터에서 올해 거둔 참깨와 고추를 말리던 주민들은 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널어놓았던 참깨 등을 옮기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마을회관에서 서금용(52)이장 등 주민들을 만나 마을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서이장은 “예전에 비해 주민수가 크게 줄었지만 마을의 애경사를 함께 하는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며 “주민들 사이에 인정이 넘치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라고 마을자랑을 했다.

함께 있던 주민 강정대(81)씨는 “넓은 농경지의 비옥한 토질로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살기 좋은 곳”이라며 “30여년 전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30㎝ 길이의 돌칼이 발견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앞다퉈 마을의 내력을 얘기하는 주민들에게서 고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났다. 


지난 60년대 중반까지 신기마을에서는 추석을 전후해서 신파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마을출신으로 교직에 있던 고 강장영씨 등 3명이 주축이 돼서 마을청년들과 함께 대본을 준비한 신파극을 무대에 올려 인근 마을주민들까지 구경을 올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의 무용담을 신파극으로 만들었으며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를 공연했다.


신기마을은 대소사에 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주민들은 지난 70년대 초반까지 마을에서 상이 생겼을 때 협조할 목적으로 유지돼 오던 2개의 상조계를 통합해 마을의 전 가구가 참여하는 통합계를 만들었다. 모든 주민이 계원으로 가입해 마을의 대소사에 힘을 모으는 통합계는 3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마을의 자랑거리다.


마을주민들은 애향심이 높기로 정평이 났다. 지난 95년 우산각을 건립하기 위해 주민들과 출향인들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1천만원의 비용을 보탰다. 또 마을의 발전을 위해 농경지 등을 기꺼이 희사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고 이원우씨와 손종술씨가 각각 1천평의 농경지를 마을에 희사했으며 장규진씨가 마을을 위해 100만원의 현금을 내놓았다. 특히 이원우씨의 유지에 따라 주민들은 이씨의 기일인 음력 11월13일에 맞춰 동계를 갖는다.

이날 주민들은 이씨가 희사한 1천평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이씨의 제사를 지낸 후 마을출신 학생들에게 50여만원의 장학금을 매년 지급하고 있다.
우산각 입구에는 마을을 위해 농경지 등을 희사한 손종술씨 등 3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신기마을 출신으로는 교육공무원으로 퇴직한 후 녹조훈장을 수상했던 이채호씨, 독립유공자로 한일은행 목포지점장을 역임했던 이정우씨, 전대병원 신경외과 과장을 지낸 이재혁씨, 목포 영애원 원장으로 있는 이상해씨, 전남도청 기획관을 맡고 있는 강진원씨, 인천지검 검사인 양호상씨, 서울 세브란스병원 감사과장으로 재직하는 강인원씨, 서울 방배경찰서 정보과에서 근무하는 강성원씨,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홍태석씨, 동아일보 파주지국장을 맡고 있는 강대석씨, 인천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는 강보원씨, 서울에서 대신의원을 운영하는 정충남씨, 군청 환경녹지과에 근무하는 양연숙씨, 서울에서 대림택시를 경영하는 강길원씨,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최병석씨, 인천에서 전자부품 생산공장을 운영하는 이제훈씨, 인천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서승미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주민들의 안내로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찾아들어간 고택에서 박계님(85)할머니를 만났다. 올해 수확한 참깨를 툇마루에 펼쳐놓고 손질하던 박할머니는 갑작스런 방문에도 반가운 낯으로 반겼다.


나주 왕곡면에서 시집와 60년 넘게 신기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박할머니는 “시집올 당시에는 3~4대가 함께 사는 집이 많았고 주민들도 300명이 넘는 마을이었다”며 “외지로 나가 성공한 자녀들이 많아서 마을의 규모는 예전보다 크게 줄었지만 다른 마을보다 단합이 잘되는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할머니는 “마을의 대소사에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주는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농사에 대해 박할머니는 “마당 자투리 땅에 고추 100주 정도를 심었고 참깨를 텃밭에서 재배한 정도”라며 “올해 궂은 날이 많지 않아서 지난해보다 수확이 괜찮은 것같다”고 설명했다.


6남3녀의 자녀를 둔 박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함께 살자고 보채기도 하지만 갑갑한 서울보다 공기 좋은 이곳이 좋다”며 “인정 넘치고 상부상조하는 우리 마을이 최고지”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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