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통해 본 영랑
기록을 통해 본 영랑
  • 김철
  • 승인 2002.11.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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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영랑선생이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진읍사무소에 보관중인 호적표에 따르면 영랑선생은 1902년 음력 12월 18일에 강진읍 남성리 22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김해김씨이며 그의 호 영랑은 1035년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랑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채준으로 불렸던 영랑은 강진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해 국어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도 중앙초등에 보관되어있는 학적서류를 보면 영랑은 입학당시 80점대였던 국어과목 성적이 졸업학년인 4학년때 국어는 92점을 받았고 한문은 94점의 높은 성적을 받았다. 시적인 재능이 국어공부를 열심히 하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24명중에서 8등으로 졸업한 영랑선생은 조혼풍습으로 15살에 김은하씨와 혼인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이 1년반만에 부인과 사별하게 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위치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한 영랑선생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받고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간 영랑선생은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때 독립투사 박 렬씨와 문학을 같이하게될 친구 박용철을 만나게 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영랑선생은 개성출신 김귀련씨와 재혼해 7남3녀의 자식을 두게 된다.

1925년 가족들과 강진으로 돌아온 영랑선생은 강진읍 남성리 탑동에서 ‘꼭대기집’으로 불린 곳에서 생활했다. 영랑선생의 6촌 동생인 강진읍 김숙자(강진읍 동성리)씨는 “흰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던 오빠는 강진의 모습을 한눈에 보며 항상 시상에 빠져 있곤 했다”고 회고했다. 강진약국을 경영했던 작은 아버지 김종석씨와 상업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던 영랑선생은 34번의 전화번호를 사용했고 전기시설을 이용했다.

영랑은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랑의 시는 언어와 음악의 시로 표현된다. 함축된 언어속에 일정한 음악성이 연관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인 송만갑을 지칭해 지은 ‘북’을 보면 영랑선생이 북의 대가임을 나타내는 한 장면이다.

영랑은 일제말기 들어서는 은거생활에 들어가 글을 쓰지않았고 해방과 함께 정치적 활동에 모습을 나타냈다.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영랑선생은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해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다. 또 지역유지들과 사립중학교 기성회를 조직해 금릉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948년 강진에서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영랑선생은 서울로 상경해 우익단체활동을 펼쳐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광복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를 올라온다’는 민족항일기의 제한된 공간속에서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져버리고 새로운 나라건설을 위해 대열에 참여하려는 모습이 크게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중앙문화에서 발간된 ‘영랑시선’이 있다. 다양한 활동을 보였던 영랑선생은 한국전쟁때 포탄의 파편을 맞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49세때의 일이었다. 영랑선생의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과 강진군립도서관앞에 세워져있다.

영랑탄생 100주년을 맞아 활발한 기념사업도 이뤄지고 있다. 영랑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전국규모의 영랑시문학상이 재정됐고 영랑백일장이 열려 선생의 탄생을 기리기도 했다

영랑 김윤식선생 연보

1902년 12월 18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21번지에서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씨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씨
사이의 2남3녀중 장남으로 출생

1909년 강진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입학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 졸업

1916년 장남조혼풍습으로 16세의 김은하(金銀河)와 결혼.

1917년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입학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 강진으로 돌아와 학생운동을
모의하다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4개월간 복역.

1920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입학.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후 학업중단

1925년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 강진으로
돌아옴

1930년 친구 박용철과 ‘시문학’창간

1935년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발간

1945년 8.15해방후 대한독립촉성회 강진군 단장역임

1948년 국회의원 선거출마에 낙마.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주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근무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선’
발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식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추대

1950년 포탄파편을 복부에 맞아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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