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군동면 화산리 화방마을
[마을기행]군동면 화산리 화방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5.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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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산 뒤로한채 오롯히 자리한 도의시범마을

황금빛 물결을 이룬 들녘에는 수확을 앞둔 보리가 남실남실 바람에 춤을 춘다. 30도를 육박하던 무더위는 쏟아진 폭우에 한풀 기세가 꺾인 가운데 보리를 수확하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주민들의 손길은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물기를 머금은 운무에 정상을 감춘 화방산을 뒤로 하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군동면 화방마을을 찾았다. 화방산이 위엄스런 자태를 뽐내고 필봉산, 비파산이 아담하게 감싸고 있는 화방마을은 고려 명종 6년(1176)경에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맨 처음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전해지지 않지만 600여년전 기계유씨와 탐진최씨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유재란 때 해남윤씨가 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후 해주오씨와 해주최씨, 광주이씨 등이 차례로 이주해 오면서 대촌을 이뤘다.


현재 마을에는 해남윤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해주오씨, 해주최씨 등이 마을을 이뤄 70여호 270여명의 주민들이 정을 나누며 지내고 있다.


화방마을은 본 마을인 화방과 남서쪽에 율산, 북서쪽의 달영으로 이뤄져 있다. 화방은 마을주위의 산세가 꽃이 피어나는 형국이라 하여 화병, 화동, 화명, 화촌 등으로 불리다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율산은 밤나무가 많았던 산에 촌락을 이뤄 율변이라 불리다 개칭되었으며 달영은 산골 다랑이 논이 많아 다랑골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또 마을에는 비파산 자락의 등성이로 보기에는 가까운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 오르면 힘겹고 긴 잔등이라 일컬어진 등잔거리, 물이 깊어 구렁이가 살았다고 전하여 이름 붙여진 마을 앞 보인 구렁보, 화방산 정상에 있는 병풍을 둘러쳐 놓은 모양의 바위인 병풍바위, 마을 동쪽 어귀 2기의 선돌이 세워져 있는 선독거리, 물이 매우 차가워 부르는 샘인 참시암, 마을 앞 들녘으로 거리가 가까워 틈틈이 농사를 돌볼 수 있었던 데서 일컬어진 잔밭들, 비파산 골짜기로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이며 대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호와동, 화방사 아래쪽에 있는 큰 골짜기인 대골, 대골에 있었던 보로 덕석처럼 넓었다고 하여 부른 이름인 덕석보, 화방에서 군동면 라천리로 넘어가는 돼지목 형국의 고개라 하여 일컬어진 독고개재 등이 마을 주민들 사이에 정겨운 지명으로 남아있다. 


화방마을은 도지정 도의시범마을이다. 마을에는 대동계와 더불어 혼상계, 제석계 등의 조직이 남아 있어 경조사를 상부상조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또 제석계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섣달 그믐날 출향인사들과 주민들이 한데 모여 합동세배를 하며 경로효친사상을 지켜가고 있다.


마을의 내력을 듣기 위해 윤개현(56)씨를 찾았다. 윤씨는 “민심이 순박하고 이웃간 상부상조가 잘 이뤄질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과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이라며 “매년 대보름, 유두, 광복절에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을 치며 모든 주민들이 함께 즐긴다”고 마을 자랑을 했다.

또 윤씨는 “화방마을은 관내 각종 행사에 초청돼 풍물 공연을 펼칠 정도로 농악으로 이름을 떨쳤다”며 “지난달 열린 군동 면민의 날 행사에서도 주민들이 농악 공연을 선보였다”고 덧붙였다.


농악으로 유명한 화동마을은 지난 76년 제8회 남도문화제에서 땅뺏기놀이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다음해인 77년 제18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해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땅뺏기놀이는 동·서군으로 나눠 모내기와 김매기를 한 후 땅을 걸고 내기를 하는 모습을 흥겨운 농악과 함께 시연하는 지역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이어져 오고 있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마을회관에 윤관현(68)이장을 만나 고찰 화방사에 얽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윤이장에 따르면 신라시대 학자 고운 최치원이 비파산에 고운사를 창건했는데 빈대가 극심해 폐찰하고 화방산 중턱의 화방사로 옮겼다.

 화방사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찰이며 한때 고시생들이 각종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모여들기도 했다. 또 윤이장은 “화방산과 인접한 필봉산은 붓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며 “필봉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마을 출신들이 서예에 깊은 조예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화방마을 동쪽 어귀에는 선돌 2기가 서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주민들은 볏짚으로 줄을 만들고 남녀 줄다리기를 마친 다음 선돌에 새끼줄로 새 옷을 입히는 입석제를 지내며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이때도 마을의 자랑인 농악이 빠지지 않는다.


전통을 중시하는 마을의 모습은 130여년전에 건립된 화산제라는 서당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매년 섣달 그믐달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이 합동세배를 함께 하는 장소다. 이곳 창고에는 각종 농악기가 보관돼 있으며 용무늬가 아로새겨진 대형 덕석기가 소중한 유산으로 간직되고 있다.


화방마을 출신으로 장흥문화원 원장을 역임하는 윤수옥씨, 강진군 농업기술센터 소장인 오기재씨, 강진경찰서 정보2계장으로 퇴직한 최태호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관을 지낸 윤종진씨, 함평 손불중학교장을 역임한 윤재기씨, 군동농협조합장을 지낸 윤관현씨, 남원세무서장을 역임한 정준영씨, 군동면사무소 총무계장으로 퇴직한 윤권식씨, 강진 임업협동조합장을 역임한 오봉재씨, 전남 도청에 근무하는 오종근씨, 장흥군청에 근무하는 윤철현씨, 경기도 이천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윤진현씨, 농어촌진흥공사에 근무하는 오종암씨, 장흥읍사무소에 재직하는 윤영상씨, 강진읍사무소에 근무하는 윤치양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콩 파종하던 이복임씨

단비에 촉촉이 젖은 긴 고랑을 따라가며 콩을 손보던 이복임(여·65)씨를 만났다.

올해 1천여평의 논에 처음 콩을 심었다는 이씨는 “새들이 파종한 콩을 파먹고 이제 막 올라오기 시작한 떡잎을 따먹어 빈 부분에 다시 콩을 심고 있다”며 “올해 쌀 수매가 없다고 해서 콩을 심기는 했는데 수확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지난해에는 멧돼지가 밭에 심은 고구마를 모두 파먹어 수확을 얻지 못했다”며 “동물들까지 농작물에 피해를 입혀 농사짓기가 갈수록 어렵다”고 덧붙였다.
40여년전 해남 계곡면에서 시집왔다는 이씨는 “시집올 당시만 해도 15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며 “가구수는 크게 줄었지만 인심좋고 마을 경조사에 함께 힘을 모으는 전통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켜가고 있다”고 마을자랑을 더했다.


2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씨는 “자식들에게 식량이라도 보내주기 위해 950여평의 벼농사를 함께 하고 있다”며 “몸은 힘들지만 자식들 주는 재미로 농사짓고 있제”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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