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 젖줄, 어상보 옛이야기
탐진강 젖줄, 어상보 옛이야기
  • 강진신문
  • 승인 2024.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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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꽃동네 군동면(3)] - 어상보와 용소(Ⅰ)

'우리 동네 옛이야기'는 강진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동화로 묶은 우리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해 11월 다섯번째 책, '우리동네 옛 이야기-꽃동네 군동면'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장미연·김옥애·강현옥 글, 김충호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강진 사람이 모여서 함께 쓰고 그린 작품집이라 그 울림이 더 크고 우리들만의 소중한 공감대가 있다. 
책을 통해 강진은 어떤 곳인지를 어렴풋하게 밝히는 마음속의 '등' 하나가 '반짝'하고 켜지길 기대해본다./편집자 주

 

어상보

 

쏴아아. 쏴아아아. 오랜 봄 가뭄을 해결하려는 듯 계속 쏟아지는 밤비 소리가 참 정겹지 않니? 이제 막 새잎을 내기 시작하는 뒤란의 감나무도 그동안의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듯 쭉쭉 빗물을 빨아올리고 있구나. 
 
"참으로 다행이구나. 더 늦기 전에 이리 비님이 쭉쭉 내려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새로 싹이 나고 있는 저 토마토도 이젠 살 수 있겠구나." 나는 흙 마당에 구멍을 낼 정도로 폭 폭 떨어져 내리는 장대비가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어.
 
"비가 안 오면 수돗물을 주면 되지 뭐가 걱정이에요?" 옆에 있던 조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 
 
"그래, 수돗물을 주면 되지. 그런데 맑음아, 수돗물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글쎄요. 수돗물은 그냥 수돗물을 모아 두는 곳에서 오겠죠? 아닌가요?" 맑음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어. 
 
"네 말처럼 수돗물은 수돗물을 모아 두는 곳에서 오지. 그렇게 내리는 비나 흐르는 물을 모아 두는 곳을 요즘엔 댐이라고 하지만 예전엔 보라고 했단다. 그럼 오늘은 우리 맑음이에게 어상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맑음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대로 까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이야. 
 
"어상보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단다. 그럼, 그중에 하나를 먼저 시작해볼까?"
 
가뭄은 지금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저수지가 많지 않던 옛날에는 더 심각한 문제였지. 백성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때였으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이런 세상에! 오늘도 구름 한 점 없구만그려." 어깨에 삽을 메고 마을 앞 논으로 나서는 돌이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를 내야 하는데 하늘은 비 한 방울 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거든. 두 달이 넘도록 비다운 비 한번 내리지를 않으니 농부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어. 논에 모내기를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밭에 심어놓은 작물들도 말라붙어 제대로 싹을 못 올리고 말라가고 있었지. 
 
"아니, 이게 뭣이여?" 논 앞에 다다른 돌이 아버지는 자기 눈을 의심했어. 아무리 가뭄이라지만 그래도 어제만 해도 물기가 조금 있던 걸 보고 들어갔는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논바닥은 물기가 거의 말라가고 있는 거야. 돌이 아버지는 미친 듯이 논두렁을 돌며 물길이 새 나가는 곳을 찾기 시작했어. 그리고 마침내 경수네 논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논두렁이 깎여서 그 논으로 물이 새 나간 거라는 걸 알아냈어. 어제 분명 대놓은 물을 경수 아버지가 자기네 논으로 몰래 끌어가 버린 거였어.
 
"이런 도둑놈 같으니라고…." 돌이 아버지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질끈 물었어.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졌단다. 
 
"이 도둑! 이런 짓을 해놓고 어디로 숨은 거야?" 돌이 아버지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들판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어. 그러다가 멀지 않은 곳에 희끗희끗한 것이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을 봤어. 예전 같으면 청보리밭 속으로 몸을 숨겨버리면 새는커녕 사람도 안 보일 정도였어. 보리논의 푸른 물결은 탐진강 물결만큼 깊고 넓었지. 하지만 푸르러야 할 그 청보리 물결도 올해는 오랜 가뭄으로 채 다 여물기도 전에 잿빛으로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지라 사람은 커녕 새 한 마리도 제대로 숨겨주질 못했어. 
 
"저것이 뭣이여?" "뜸북! 뜸북!" 도톰한 몸체로 봐서는 두루미나 왜가리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지. 
 
"아이고, 뭔놈의 뜸북이가 목 쉰 소리를 낸다냐? 확 잡아서 구워 먹어 버려야겠구만!" 돌이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고 성큼성큼 뜸북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어. 뜸북이는 다름 아닌 경수 아버지였단다. 경수 아버지는 놀라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마을에서 제일 키가 큰 돌이 아버지가 긴 다리로 쫓아오니 결국은 등덜미를 잡히고 말았지.
 

 

"잡았다, 요놈!" "아이고, 형님!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단 말인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제." 돌이 아버지는 분이 삭히질 않아 바로 경수 아버지 멱살부터 거머쥐었단다.
 
"아이고! 형~형님! 이것 좀 놓고 얘기하시오. 숨, 숨이 막히요."
 
"뭐야, 이 도적놈아! 누가 네 형님이냐? 같은 동네 동생이라고 봐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 가뭄에 남의 논의 물을 도둑질해? 난 너 같은 도적놈 동생 둔 적 없으니께 거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엇!" 돌이 아버지는 멱살을 더 바투 쥐었어.
 
"아이고! 켁! 켁! 나 진짜 죽겄소! 동네 사람들! 사람 죽소!" 경수 아버지가 눈알이 벌게져서 소리쳤어.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들판에 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풍동, 안지(어상보를 사이에 둔 양쪽 마을로 군동면 풍동 마을과 안지마을) 마을 사람들까지 다들 들판으로 달려 나왔단다. 
 
"아이고! 이 사람 이거 놓고 얘기하게." "그래요, 돌이 아버지. 좀 놓고 차분히 말로 합시다."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돌이 아버지를 겨우 떼어 놓았어. 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지. 
 
"동네 사람들 이것 좀 보시오. 아무리 가뭄이라지만 그래도 모는 심어야 먹고는 살 거 아니겄소?" 돌이 아버지의 목소리엔 이젠 분기가 빠지고 서러움이 북받쳤단다.
 
"그야 그렇지. 여기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가?" 점순이 할아버지가 돌이 아버지를 토닥거리며 달랬어.
 
"그건 그렇고 돌이 아버지 이 가뭄에 논바닥을 적실 정도 물을 어디서 구했다요?" "그러게나 말이여. 설마 용소 물을 어떻게 끌어온 건 아니겄지라?"
 
"용소 물을? 설마 그랬겠어? 아무리 돌이 아버지가 기골이 장대하기로서니 이무기를 어떻게 대적하겠어?" "그람 이무기인지 용인지 진짜 그 굴에 살긴 사는 거요?" "안 살면 자네도 거기 물을 퍼올 참인가? 아, 그런 생각은 아예 하덜 말어."
 
"어째서 안 된다는 거여?" "아 몰라서 묻는가? 재작년 여름이던가? 밤나무골 김 영감도 그 앞을 지나다가 대가리에 귀가 둘 달린 커다란 구렁이 같은 것을 보았다 하질 않던가? 그 길이가 8척이 넘는다고 했지, 아마? 그것이 구렁이가 아니고 천 년 묵은 이무기인 거여. 하늘로 오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이렇게 가뭄이 심해 비 한 방울 안 내리니 용이 못 되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여." 경수 아버지는 마치 눈앞에 이무기를 마주하기라도 한 듯 침을 튀기며 신나게 얘기했어.
 
"아이고, 참말인갑네. 그래서 이 가뭄에도 그 용굴 앞에만 가면 서늘하잖여." "그러게 말여. 또 그 깊이는 어떻고? 이 가뭄에 다른 데 물은 다 말라도 용굴 앞은 물이 마르질 않잖여. 예전에 어떤 한량이 그 깊이를 알아보겄다고 실 끝에 돌멩이를 매달아서 넣어본 적 있다더만…."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용소 이야기에 모두 눈을 반들반들하게 빛냈어. 전설대로 이무기가 용이 되어 비를 흠뻑 뿌려주기를 바라는 거지.
 
"아, 그 많은 실타래가 다 들어가는 데는 돌멩이가 바닥에 닿지를 않더라네. 그러니 용굴 앞에서 섣불리 헤엄이라도 치려고 했다간 목숨을 잃을 것이여. 원래 영물(용이나 봉황 등 신령스러운 동물)이 사는 곳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라네."
 
"아, 영물이든 뭐든 진짜로 용이 있다면 비구름 좀 몰고 와서 제발 이 가뭄 좀 해결해 주면 좋겄소." "그러게나 말이요."
 
"그래서 그 신령한 용굴 앞엘 가서 시방 돌이 아버지가 물을 퍼왔다는 거요? 와따, 돌이 아버지 진짜 겁도 없소잉."
 
용굴 이야기가 끝나자 사람들 시선은 다시 돌이 아버지에게 돌아왔어. 돌이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의심 반, 걱정 반인 얼굴을 어이없게 바라보고 입을 뗐어.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용굴 앞엘 왜 갔겠소?"
 
"그건 그러제.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이 근방 사람치고 용굴 앞을 함부로 범할 사람은 없제."
 
"어제 하루 내내 탐진강 바닥에 코를 박고 뒤지고 뒤져서 그나마 짜작짜작 고여있던 물웅덩이를 찾아내지 않았겄소? 그걸 또 겨우겨우 퍼다가 논바닥이라도 적셔보자 했는디 세상에 그 물을 도적질 해부렀소. 그러니 내가 시방 화가 나겄소, 안 나겄소?"
 
"오메! 아직도 남아있는 물웅덩이가 있다요? 거기가 어딜까?"
 
"그러니께 말이여. 나도 강바닥에 코를 박고 뒤졌는데도 겨우 바가지로 퍼낼 정도이지 논에 물 댈 정도는 아니던데?"
 
"혹시 쩌어기 풍동 앞에 갈대숲 우거진 쪽 아니여?"
 
동네 사람들은 강바닥에 아직도 물웅덩이가 남아있단 말에 모두 눈빛을 번득였지. 그도 그럴 수밖에. 한 바가지의 물도 아쉬울 때잖아.
 
"뭔 소리요? 이 가뭄에 무슨 물웅덩이가 따로 있겄소? 그냥 여기저기서 조금씩 퍼담아서 모은 거지라."
 
돌이 아버지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어.
 
"맞네, 맞아! 거긴가 보구만! 돌이 아버지 방금 눈빛 흔들리는 거 봤소? 돌이 아버지는 욱 하는 성질은 있어도 거짓말은 못하지. 솔직히 말하시오. 아직 쓸만한 웅덩이가 남아 있지라? 그런 웅덩이를 봤으면 같이 알아야지 혼자 논에 물을 댔단 말이요?"
 
"시상에! 돌이 아버지 그라고 안 봤고만 겁나게 이기적이고만." "그랑께 말이요. 한동네 사람들끼리 그라고 인심 사납게 허는 것은 아니제." "나는 지난달에도 돌이네 먹을 양식이 떨어졌대서 시아버지 제사 때 쓸 쌀을 한 되나 빌려줬는디 이럴 수 있소? 진짜 서운하구만요. 딴사람한텐 몰라도 나한테도 비밀로 한단 말이요?" 옆집 사는 영암댁이 얼굴 가득 서운함을 담고 말했어.

"뭐시여? 그랑께 영암댁 말은 강물이 당신들 두 집 것이란 말이여?"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라요?"
 
물웅덩이 하나에 동네 사람들 신경이 모두 곤두섰어. 처음엔 돌이 아버지를 두둔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 돌이 아버지를 비난하기 시작했지. 돌이 아버지는 참 억울했겠다고? 그럴 테지. 힘들게 찾아낸 물을 밤새 퍼다가 겨우 논을 적셔놓은 것인데 인심 야박하단 말이나 듣고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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