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구강포에 달이 뜨면
[다산로] 구강포에 달이 뜨면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4.08.06 0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구강포는 참 친숙한 말이다. 강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포구이다. 한자 그대로 풀면 ‘아홉강 포구’ 정도로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구강포와 함께 백금포, 남당포 등도 내가 사는 강진에서는 익숙한 이름이다.

남당포(南塘浦)는 지금의 남포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갑인년(1794) 편에서 ‘조선시대 병영의 외창(外倉)이 강진현의 남쪽 5리 남당포에 있었는데, 3천여 석이 넘는 창고의 곡식을 주민들에게 환곡으로 나누어 주었다’라는 기록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구강포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쉽게 말을 하면서도 “구강포가 어디야?” 하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막연히 백금포나 남포, 다산초당 아래 바닷가를 떠올리곤 했으니까 말이다.

강진만에 접해 있는 초중고의 교가를 살펴봤다. 강진중과 전남생명과학고(구강포 맑은 물이∽), 강진여중(구강포 모인 물결 강진만을 감싸안아∽), 강진고(열골물 모여들어 구강포 합수하듯∽), 도암초(구강포 넓은 바다∽), 칠량초(구강의 푸른바다∽), 대구초(구강에 푸른 물결∽) 등 강진만 대부분의 초중고 교가 가사에 구강포가 들어가 있다.

그만큼 강진에서 구강포의 상징성은 크다. 강진의 금릉팔경(金陵八景)에 구강포에서 불을 켜고 고기를 잡는 야경을 의미하는 구강어화(九江漁火)가 들어있는 부분도 눈여겨볼 만하다. 

구강포는 내가 생각한 대로 남포나 도암만의 어느 특정 포구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칠량, 대구 지역 학교의 교가에서도 모두 구강포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강포는 이미 강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우리들의 포구였다.

우연인 듯 약속인 듯 줄줄이 흘러 흘러
굽이굽이 아홉 굽이 물굽이를 휘돌아서
한줄기 인연의 강물 개어귀에 닿았을까

초당 불빛 내려와 윤슬로 뜬 강가에서
흰 달빛 홀로 품은 남당포 여인이여
석가산 백일홍 같은 연지곤지 찍겠네
-유헌 「구강포에 달이 뜨면」 전문

1801년, 삭풍 휘몰아치는 동짓달 저물녘, 강진 동문 밖 주막에 남루를 걸치고 한 남자가 도착한다.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과 강진이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천 리 먼 길 귀양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4년을 기거한다. 그 후 보은산방, 이학래 집 등을 거쳐 드디어 1808년 봄, 만덕산 초당에 정착한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본격적인 저술 작업에도 들어간다. 그때 만난 여인이 홍임의 모(母)라 불리는 남당포의 남당네이다. 문사고전연구소장 양광식 선생은 홍임은 소설 속의 이름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막수‘라고 했다. 부담 없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남당네는 초당 강학(講學)과 집필에 불편함이 없도록 늘 곁에서 다산을 도왔다. 빨래를 하고 병수발을 들고 밥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딸까지 낳았다. 그 딸에게 다산이 남긴 그림이 의증종혜포옹매조도((擬贈種蕙圃翁梅鳥圖)이다. 가경 계유년 8월 19일, 1813년의 여름 일이다.

18년의 강진 유배 중 다산이 사랑한 유일한 여인 남당네, 유배 첫날 모두가 눈길조차 주지 않고 피하던 대역죄인 다산을 따뜻하게 품어준 동문 밖 주모, 그 두 여인이 없었더라면 다산은 어떻게 됐을까.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는 지난 2012년, 다산은 루소, 헤르만 헤세, 드뷔스와 함께 유네스코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었다.

그해 여름처럼 다시 여름이 왔다. 그날처럼 구강포에 흰 달빛이 차올랐다. 강진만, 어쩌면 남당포 갯가의 돌로 쌓아 올렸을 초당의 연지(蓮池) 석가산에 백일홍이 피었다. 다산과 다정히 연지 주변을 걷던 남당네의 볼에 핀 연지곤지처럼 백일홍이 활짝 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