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백련사의 차 향을 전하다
고려시대, 백련사의 차 향을 전하다
  • 김철 기자
  • 승인 2024.06.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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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강진차 고려시대를 알리다(4)

강진차는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생활하면서 중흥기를 맞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고려시대에도 각 사찰을 중심으로 널리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말들이 있다. 문헌과 각종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강진차를 하나씩 되짚어보고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다. 편집자주/

 

 


백련사, 용혈암 곳곳에 차 관련자료 풍성 

백련사는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 수도도량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211년(희종 7) 圓妙國師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다. 원묘국사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 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백련사에 자리를 잡아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80칸의 대가람을 짓게 하였다. 
 
이 대역사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야 완공되었으며, 당시 강진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여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바로 송광사의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이 뒤로 120년 동안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한 명찰이었다.
 
이러한 백련사는 백련결사를 통해 강진 차문화의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백련사의 차문화에 대한 기록은 백련결사 제2대 사주인 정명국사(靜明國師, 1205-1248) 천인(天因)에게서 본격적으로 찾아지고 그 전통은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로 이어져서 수도 개경의 묘련사(妙蓮寺)로까지 나아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고려시대에 차를 구하고 선물하는 풍습은 승려 사이에서나 문인들 사이에서 행해진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고려후기 진정국사 천책(眞靜國師 天頙, 1206~?)의 『湖山錄』에 실려 있는 「선사께서 차를 보내주심에 감사하며」라는 시에서도 이런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귀한 차는 몽정산의 봉우리에서 딴 것으로
이름난 물, 혜산천을 길었으니, 
졸음을 깨끗이 물리칠 수 있고
손님과는 한가함 누릴 수 있으리.
털구멍으론 이슬 같은 땀, 송골송골 맺히고
겨드랑이엔 맑은 바람 살랑이네.
어찌 신령한 약을 마신
연후에야 동안을 유지할까.
 

 

진정국사는 백련사에서 수행했던 고려 후기 승려로, 圓妙國師의 제자이며, 백련사의 4대 조사(祖師)로 추앙받았다. 시문에 뛰어났던 그는 차를 즐긴 수행자로, 말년에 용혈사(龍穴寺)에서 여러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또한 진각국사처럼 문과에 급제한 후 출가한 인물이다.
 
그가 시에서 말한 몽정차(蒙頂茶)는 중국 사천성 몽정산(蒙頂山) 정상에서 생산하는 명차로, 당나라 때부터 황실에 공납되었다. 특히 몽정차는 약성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의 「東茶頌」에도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정차는 약성이 좋다(陸安之味蒙山藥)"고 했다. 따라서 진정국사가 활약했던 시기에도 몽정차가 고려에 소개되어 왕실 귀족과 승려들이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차운기정용혈대존숙장실(次云奇呈龍穴大尊宿丈室)」이라는 시는 김서(金舒)가 진정국사에게 보낸 것인데, 진정국사가 백련사에서 용혈암(龍穴菴)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할 때 사람들이 그를 '용혈대존숙'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님이 베푸는 찻자리에 참석하고 싶은 김서는 '보잘 것 없는 못난 손님일지라도 마다 말고 맞아주셔요(茶席猶堪備惡賓)'라고 하였다.
 
용혈암은 고려말 백련사 백련결사의 융성기부터 있어온 암자이며, 현재 석축이 잘 남아 있으며 주위에는 천연 차나무가 많이 보이고 있다. 용혈암은 天因, 天頙, 丁午, 無畏4국사의 정령이 깃든 수행처로 유명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1808년 다산초당에 있을 무렵부터 해마다 산에 꽃이 만발하면 석문(石門)을 지나 벗들과 함께 이 용혈암을 찾았다고 한다.
 
고려 민중불교인 큰 흐름중 하나가 바로 만덕산 백련결사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국사가 바로 圓妙國師 了世이다. 마치 그의 이름처럼 그는 이제까지의 세상을 끝내고,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한 그가 임종을 한 곳은 백련사에서 10여리 떨어진 바로 이 덕룡산 용혈암이다. 靜明國師 天因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정명국사는 수많은 시문과 문장을 남겼으나 문집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문선(東文選)』에 보이는 몇 시문 속에서 차를 언급한 두 편의 시가 있다. 이 가운데 「기옥주서상인(寄玉州誓上人)」이라는 시에 '차달이고 밤을 구어 맑은 기쁨 누린다(煮茗燒栗圖淸歡)'는 문장이 나온다. 
 
또 다른 시인 「운상인이 병중에 지은 시에 차운하여 次韻雲上人病中作」를 보면, 정명국사는 '입술이 다 깨어진 다완(茶甌進缺唇)'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걸림이 없는 무애선미(無碍禪味)의 차 경지에 노닐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 옛 절에 돌아가며 
어디에서 어머님을 봉양하리 
한가히 암자에 들어 앉아 
찬불가를 부르니 입신의 경지로다. 
시의 맑음은 일모뿐 아니요 
화답이 적은 좋은 봄날이라 그런 것 
헤어진 누비옷은 올이 너덜너덜 
내어 온 차는 주둥이 깨어진 잔 
가엾어라 그대가 쭈욱 그믐과 새해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있다니 
먼 데서 무슨 핑게로 문안하리 
품은 뜻을 글로 다 못 쓰겠네. 

고려시대의 귀족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헤어진 누비옷과 깨어진 찻잔이 상징하는 것은 검소하고 담백함이라 하겠다.
 
무외국사는 백련사의 8대국사의 마지막 국사이다. 무외국사 또한 이곳 용혈암에 머물렀다. 무외국사를 통해 강진 백련사와 고려의 개경과 이어주는 차문화 고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현은 무외국사에게 개성 묘련사에서 발견된 석지조에 관한 품평을 받으면 반드시 값이 몇 갑절이 나갈 것인데, 우거진 잡초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이 석지조는 물을 끓이는 곳과 물을 받아두는 것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우리나라 특유의 차구를 말한다. 무외국사의 품평을 받았으면 비싼 값이 나갔을 것이라 말하는 걸로 보아, 당시 무외국사의 다구 감식안목을 이제현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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