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사랑 냄새 가득한 밤 꽃이 만개하다
[다산로] 사랑 냄새 가득한 밤 꽃이 만개하다
  • 김점권 _ 사회복지사, 전 기업인
  • 승인 2024.06.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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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 _ 사회복지사, 전 기업인

초여름의 6월, 불볕 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간밤에는 날씨가 약간 무더워서 창문을 반쯤 열어 놓고 잠을 청하는데, 대자연의 합창 소리가 정답기 그지없었다. 
 
집 앞 모심은 논에 개구리, 맹꽁이 합창소리, 뒷산 산골에서 울려 퍼지는 꾀꼬리 소쩍새 소리, 마을의 정적을 깨는 뒷 집 멍멍이 소리, 시간에 관계없이 가끔 씩 울어대는 수탉의 회 치는 소리, 이름 모를 밤새들의 자장가 소리, 여치와 쓰르라미의 정다운 화음, 고향의 여름 밤은 화려한 자연 교향 악단이다.
 
시원한 아침, 햇볕 강해지기 전에 정원의 풀밭을 매야 한다. 그리고 동네 뒷산 산보를 나갔다. 산속에는 밤 꽃 천지다. 밤 꽃 냄새는 특이하다. 이른바 남성 정액 냄새와 비슷하다고 한다. 밤 꽃과 남성 정액은 스퍼미딘 (SPERMidine)과 스퍼민 (SPERMine)이라는 성분이 공통으로 들어있으며, 이 염기성 물질로 인해 비릿한 정액 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밤 꽃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밤 꽃이 필 때는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가고 과부는 밤 꽃 근처를 피했으며, 밤 꽃 향기에 얼굴을 붉히면 처녀가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밤 꽃에는 성적 뉘앙스가 물씬 풍겨 나와 사랑의 묘약으로 치부되기도 하며, 실제로 최음제 효과가 있다고 하여 밤 꽃 필 때 사랑을 고백하면 효과가 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밤 꽃의 향기는 강하고 진해서 약간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다양한 부문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특히 밤 꿀은 자연산 꿀 중에서 가장 상급으로 대우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진한 향기 속에 포함된 다량의 페놀, 플라노이드 성분은 근력을 강화해 주고 기침 치료나 신체 쇠약자에게 기력을 회복하게 해주는 정력 보강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사실 남성의 정액은 그 남자의 신체적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적인 결과물이다. 밤 꽃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자, 밤 꽃 자랑은 그만해야겠다. 무슨 양봉 업체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밤나무에는 더한 자랑이 있다. 가을이면 적갈색으로 토실토실 익은 밤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밤나무는 주변 과실 중에서 가장 늦게 꽃이 피는 편이지만 가장 먼저 과실을 제공한다. 밤 열매는 6월 초부터 꽃 피고 100일이 채 안 되는 9월 중순부터 익어가기 시작하여 10월 중순이면 수확 완료다. 
 
그런데 밤 열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간단치 않다. 마치 옛날 아녀자들 옷매무새 챙기듯이 겹겹이 철갑을 두르고 있다. 겉에는 가시가 꽉 찬 껍질로 싸여있고, 그 속에는 갈색 겉껍질로 완전히 무장하고 있으며, 갈색 껍질을 벗기고 나면 얇고 떫은 속 껍질이 또 한 겹 둘러싸여 있다. 
 
가히 첫날밤 신부 옷 만큼이나 중무장한 셈이다. 이렇게 알차고 속 깊은 열매가 그렇게 빨리 성장하고 여물어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베풀어 주다니, 가히 신이 인간에게 준 귀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밤 톨을 먹을 것인가? 물어볼 것도 없다. 생으로도 먹고, 구어서도 먹고, 삶아서도 먹으며, 말려서 가공하여 다양한 간식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맛있어서 영양분이야 따지고 말고 할 일이 없었지만, 알고 보니 전분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이 풍부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최고의 식품이라고 한다.
 
사실, 밤은 어린 시절 구황식품이었다. 어린 시절, 8월 말 9월 초 경이면 배고프기 딱 좋은 시기다. 쌀 수확은 언감생심 아직 멀었고, 고구마 열매는 어린애 손가락 수준으로, 어느 것 하나 텅 빈 배 속을 채울만한 먹거리가 없었다. 
 
이때부터 우리들은 산속으로 매일 출근이었다. 산속에는 야생 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여물도 들지 않은 생방으로 허기를 메웠다. 밤나무 주인에게 허락은 받았는가? 턱도 없다. 들킬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밤 열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연한 푸른 녹색에서 갈색으로, 꽉 다문 입술에서 슬며시 입술을 열어가다 어느 날 환하게 속 살을 내비치고, 10월 초가 되면 밤톨은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땅으로 떨어진다. 밤과 함께 한 달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깊은 가을에 접어든 셈이다.
 
뒤 동산에 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제 밤 꽃을 부끄럽게 바라볼 아낙네도 없고, 밤 열매 익기만 기다리는 배고픔도 없지만, 진한 밤 꽃향기는 문득 스쳐 지나간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기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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