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병영 삭둔마을
마을기행-병영 삭둔마을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2.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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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 휘감은 ‘천혜의 보고’ . 도강김씨에 의해 500년전 촌락 형성. 행정상 석양리에 속해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 삭둔마을 전경

<사진뉴스>

★이 기사는 지난 2000년 7월 7일자 게재된 본보 기획시리즈 '마을기행' 입니다. 약 2년이 지난 기사이므로 일부 내용은 현재의 상황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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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둔마을 주변은 온통 산이다. 뒤쪽의 화방산을 정점으로 오른쪽으로 갈미봉 준마봉으로 연결되고 왼쪽은 안산으로 연결돼 그 산사이에 들판이 있고 마을이 위치한 형태이다. 그리 위압적이지 않은 산세라 마을과 조화를 잘 이룬 마을이기도 하다.

병영면 삭양리 삭둔마을. 삭둔마을은 화방산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동으로는 장흥읍 성불리와 맞닿고 서로는 도룡리 남으로는 화방산 북으로는 수인산 아래 있는 백양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장흥과 경계를 이루는 행정구역상 백양마을과 함께 삭양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삭둔마을은 월출산에서 발원한 물이 금강천을 이루어 작천과 병영들판을 지난 다음 장흥으로 들어가는 협곡입구에 자리잡았다. 병영에서 국도835호선을 따라 장흥쪽으로 가다보면 도룡리를 지나 백양마을이 나오고 500m쯤 더 가 오른쪽에 금강천을 건너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삭둔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탐진강의 큰 지류중의 하나인 금강천은 너른 들판을 지나면서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이 이곳 삭둔마을앞에서부터 물흐름이 다소 빨라진다. 장흥읍과 병영쪽이 지대의 높이가 다르고 이곳일대가 협곡이다보니 빠른 물살을 만드는 것이다.

문헌상 삭둔마을이 처음나오는 것은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고군면 24개마을중 한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헌 기록과는 달리 1976년 마을유래지조사기록에 의하면 실제 마을의 형성은 약 500년전에 도강김씨가 피난와서 살게 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자 일자로 늘어선 큰 소나무들이 마을진입로 초입에 횡으로 서있고 논에서는 모가 제법 자라 완연한 녹색을 띠는 게 마을주위의 산의 녹음과 비슷하다.

삭둔마을에 들어서니 온통 사방이 녹색이라 보는 눈이 시원하고 편안하다. 삭둔은 현재 19호 35명이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많을 땐 30호 160명정도 됐으나 1/4도 안되는 수로 줄어들었다. 학생들이래야 고등학생 1명과 유치원생 1명이 고작이다. 마을입구 오른쪽에는 산골짜기속에 1가구가 산다. ‘삭금’이라고 불리우는데 역시 삭둔마을에 속한다. 마을에 환갑아래 젊은 사람이 4명밖에 안돼 학교는 병영초중고교를 주로 다니고 고등학교는 장흥이나 광주로도 많이 다닌다.

병영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삭둔은 마을이 장흥과 경계지역이라 강진장보다는 병영장, 장흥장을 많이 이용한다. 차가 다니기전에는 강진장에 다닐려면 형제바위재를 넘어서 강진장에 가 나무나 채소를 팔았다. 삭둔마을 이장은 올해 서른 셋인 김종희씨가 맡고 있다. 삭둔마을에서는 쌀보리가 주작목이고 이외에도 콩이나 깨등 밭작물과 단감 배 등을 재배하고 있다. 삭둔마을의 호당경지면적은 밭이 만평 정도이고 논이 6만여평 된다. 동네사람중 김종식(57)씨가 배밭3000평을 조성 4년째를 맞아 올해부터는 수확에 들어간다. 감나무는 박남수씨등 4집에서 1400평 정도 재배하고 있다. 전에는 밭이 많이 있었는데 경지경리를 하면서 밭이 논으로 되어버려 밭이 없어져 버리다시피 했다. 가축은 이상진씨가 소 30두를 키우고 있고 김종식씨가 돼지 100여수를 키우고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두 마리 키우는 정도다.

마을이 외진 곳이다보니 문화혜택이니 산업발전의 수혜를 받는데도 제일 늦은 편이었다. 아궁이 땔감 지게 우물 이란 단어는 삭둔에 어울리는 단어들이었다. 그러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어느틈엔가 한집씩 수도시설을 하기 시작했고 재작년에 마을관정을 파서 집수장을 산에다 설치 집집마다 쓰게 됐다. 가뭄걱정없이 논농사 마을앞을 흐르는 강을 건널 때 징검다리를 이용했다. 그러다 70년도에 다리가 생겼다. 당시는 마을길이래야 논둑으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로 좁았다. 그러다 박정희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확포장되었다. 마을에 논들이 대부분 다랑치논들이 되다보니 물대기가 어려웠다. 70년도 축조된 조그만 저수지가 있었으나 물이 부족했다. 그러다 12년이 지난 82년도에 전국에서 24명이 초청된 내무부초청반상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당시 이장일을 맡고 있던 박남수(69)씨가초청된 자리에서 건의해 한해를 없앨 수 있는 현재의 저수지를 축조하게 됐다. 박씨는 마을에서 24년간을 이장을 맡아온 마을개발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96년에 와서야 마을도 경지정리의 혜택을 보게됐다. 앞으로는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다리도 내년이면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마을에서 건너 다니는 삭둔교는 비가 100㎜만 와도 물이 넘치기 때문에 1년중 교통이 완전히 두절되는 경우가 5∼6번정도 된다. 한번 물이 넘치면 이틀동안 밖으로 못나간다고 한다. 새로 들어설 다리는 길이 120m 폭7m크기로 예정되어있다. 다리가 완공되면 동네사람들의 숙원사업들은 거의 해결되게 된다고 한다.

점점 살기 좋아졌는데 이런 얘기도 들린다. 인심이 예전만 못하고 각박해졌다고. 예전에는 무배추 등 채소를 심지어는 강아지도 나눠서 키울 정도로 의지하며 살았었는데 그런게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마을에 행사가 있으면 모두 참석해 같이 해결하고 음식을 나눌 정도로 정이 살아있다. 삭둔마을에는 사장나무가 없다. 100년정도된 감나무가 제일 오래된 나무다.

왜정때에는 마을앞쪽 냇가에 목욕통이라는 곳에 사장나무가 있었는데 논을 만들면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마을에는 물레방아도 있었는데 지금은 자식들이 다 뜨고 없지만 김해김씨 천석꾼이 마을에 살면서 물레방아를 놓고 잠실을 지어서는 누에도 많이 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산으로 둘러친 마을에는 명당이라 불리는 곳이 많은데 여덟 개의 명당중 1개명당은 아직 못찾았는데 묘를 쓰면 자손대대로 영화를 누린다고 전해진다.

마을에는 8감사가 나왔다고 하여 팔감사명당, 마을동남쪽에 있는 까치명당, 호랑이 꼬리에 해당된다는 명당인 호미명당은 남양방씨가 썼다. 또 학날개명당이라는 마을 바로 뒷에 있는곳에는 해암 김응정(1527∼1620)의 묘를 썼다고 한다. 해암은 조선시대 충효를 실천하고 뛰어난 문장가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장군대좌 옥녀세당 옥녀단장 자리에도 연안차씨 영양천씨 탐진최씨 등이 묘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마을사람들은 도강김씨인 김응정씨가 친필로 써서 마을규정 등 마련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문화관광부에서 복사해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해암은 초등학교교과서에도 나온다고 한다.

옛날에 병영하고마을앞강을 배진강이라고 했는데 도강이라고도 해 도강김씨의 시초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에는 현재 경주김씨가 많이 살고 광산김씨 김해김씨 경주이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에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일제때인 42년 임오년 가뭄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한해가 심해 솔잎을 따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현미재도 먹고 살고 콩깨묵을 배급해줘 먹고 살았다고 한다.


삭둔마을은 산으로 둘러쳐있어 각각의 이름들을 가지고 잇는 바위와 골짜기 등이 참으로 많다. 각시바우로 시작 눈물바우 광대바우 맷돌바우 관대바우 생이바우 자래바우 질난 바우 짐짝바우 형제바우가 있고 화방산 갈미봉 장군봉 준마봉 사이로 각시당골 깐치밧골 동박골 무나무골 방애골 범골 비녀골 삼산골 샛골 서당터골 숯골 좁은 골 높은 등 진잔등 산소등 참새암 큰까끔 등. 알고보면 각각 비슷한 물건들의 이름과 의미를 따 지어진 이름들이다. 옛날 갈쿠나무 물거리나무 철나무를 해서 연료로 쓰고 내다팔던 시절 어른들이 붙여논 이름들이라고 한다. 그중 형제바우를 넘으면 군동 화산리와 연결된다.

범골에 있는 범골바우는 이 마을 이정연씨의 부친 이화신씨가 일제시대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어 3형제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누가 잘 불러주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것들이지만 산업화되기전 수백 아니 수천년 그 이상 닳도록 이용했고 그 이름이 귀에 못이 박혔을 애환서린 이름들이 아니던가?. 이와 비슷하게 상포계며 품앗이 울력이라는 말들도 시대가 변하면서 듣기 어렵게됐다. 누가 그랬던가?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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