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벌과 벌
[다산로] 벌과 벌
  • 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 승인 2024.04.0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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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 _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우리 집 마당가엔 돌확이 둘 있다. 한옥 처마 아래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놓여 있다. 돌확을 들인 후 바닥에 흙을 깔고 물을 채웠다. 나름 멋진 돌을 몇 개 골라 섬도 만들었다. 어리연도 심었다. 한때는 두세 마리 금붕어도 놓아길렀다. 
 
살랑대는 물고기는 없어도 돌확이 품은 풍경은 살아 움직인다. 나이든 오엽송의 무성한 잎새에서 돌확으로 그늘이 흘러내리고 한낮엔 말벌이 조용히 다녀간다. 동그란 돌확의 끝에 매달려 물구나무로 목을 축이고 날아가는 그 말벌의 뒷모습은 또 어떠한가. 절벽의 진달래꽃을 한 아름 꺾어든 천 년 전 어느 순정한 노인의 몸짓과 겹쳐 있다.   
 
소낙비 몇 차례 지나가고 가을이 오면 돌확의 수면 위로 흰 구름이 떠간다. 낙엽 몇 잎 뒤를 따른다. 얼었다 녹았다 돌확이 몸을 풀면 어느새 봄, 어리연이 노란 꽃대를 쭈욱 밀어 올린다. 고목 철쭉은 꽃봉오리 팡팡 터뜨리며 연분홍 물감을 돌확에 쏟아붓는다. 허공을 둘로 잘라 놓은 듯한 자그만 돌확에 우주의 삼라만상이 가득하다.
 
그렇게 봄은 왔지만 벌들은 오지 않았다. 돌확의 어리연꽃에 벌들이 날아들지 않았다. 산수유나무 꽃술 안에도, 모란꽃 그늘 위에도 벌은 없었다. 소문대로 벌이 사라졌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개울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오던 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가 윙윙거리던 벌들의 부산한 날갯짓을 멈추게 했을까. 

벌들이 사라진다 벌로 죽어간다. 벌들이 왜 벌을 대신 받아야 하나. 주범은 따로 있는데, 꿀만 빠는..., 인간들!
-유헌 「벌과 벌」 전문

기원전부터 우리 인간이 기르기 시작했다는 꿀벌은 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한번 나가 자기 몸무게의 3분의 1이나 되는 꿀과 꽃가루를 실어와 벌집에 저장한다. 꿀벌 한 마리가 하루에 찾는 꽃은 수천 송이, 이 과정에서 수술과 암술의 수분이 이뤄져 우리는 과일과 채소를 얻으니 꿀벌은 최고의 농사꾼이다. 
 
그런 베테랑 꿀벌이라 할지라도 꿀을 그냥 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노력이 눈물겹다. 일을 나갔다 새로운 꽃밭을 발견하면 집에 돌아와 열심히 춤을 춘다. 동료 벌들 앞에서 원형 또는 8자 모양의 엉덩이춤을 추며 꽃이 있는 곳의 멀고 가까움을 알린다. 빙빙 도는 각도로는 꽃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다니 생존을 위한 벌들의 의사소통 언어가 놀랍다. 
 
이처럼 벌은 자연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곤충이다.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이 작은 곤충을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체로 선언한 사실만 봐도 그렇다. 유엔도 매년 5월 20일을 '세계 꿀벌의 날'로 지정해 생태계 보호의 첨병이자 인류를 먹여 살리는 큰 일꾼인 꿀벌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꿀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당장 지구 생태계의 균형이 붕괴돼 인류가 식량난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전 세계 100대 작물 중 70% 이상이 수정에 의존하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벌이 실종되면 식물도, 초식동물도, 육식동물도, 우리 인간도 줄줄이 사라지게 될 거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구상에서 왜 벌들이 사라지는 걸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상기후를 첫 번째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꿀벌에게도 기상이변이 가혹한 형벌이라는 얘기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 일 나간 벌들이 얼어 죽고, 환경파괴로 면역체계가 약화돼 집단 폐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구 온난화가 기후위기를 부르고 그 이면에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 하겠다.  
 
그랬다. 우리 집 돌확의 어리연꽃에 벌이 찾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휴대폰의 전자파든, 살충제든, 지구 온난화 때문이든 그 중심에 인간이 있었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한 꿀벌 실종 사건의 용의자는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나였다. 여러 실험 결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달콤한 꿀만 찾는, 편리만 좇는 내가 주범이었던 것이다. 꿀벌을 지키는 일, 지구를 살리는 일이고 나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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