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 낭송, 내 삶을 담아 온몸이 울리도록
[기고] 시 낭송, 내 삶을 담아 온몸이 울리도록
  • 차경희 _ 시안
  • 승인 2024.04.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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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희 _ 시안

15~16년 전, 전화 한 통이 왔다. 강진에서 시낭송회를 열고 싶은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변 문인을 통해 나를 추천 받았다고 한다. 시 낭송 쪽으로는 전혀 관련된 일을 진행했던 적이 없던 터라, 누굴까 궁금하기도 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시 낭송을 하는 사람들을 알아보니 광주에서 수요일 밤이었다. 안타깝게도 수요일은 교회 예배가 있어 참석할 수 없었다. 오지랖 넓다는 얘기를 종종 듣던 나는 비록 참석은 못 하지만, 광주가 아닌 목포의 모임 시간을 알아내었다. 시간에 맞춰 참석자들을 시 낭송 모임 장소에 태워다 주기 위해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시 낭송'의 매력에 빠져든 운명의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지금의 시 낭송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이미란 회장님과 그날 처음으로 연을 맺게 되었다. 시 낭송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순간이 아직도 떠오른다. 콕콕 가슴에 와 박히는 청아한 이미란 회장님의 목소리가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시어를 우아하게 표현하는 모습에 뭔가에 홀리는 것 같았다. 만남은 가볍기 그지없게 시작됐으나 그 울림은 어찌나 묵직하던지. 나 또한 시낭송회에 반드시 참여하고 싶은 욕심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다음부터 매월 모이는 날만 되면 주변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시 낭송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차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시 외우기를 좋아하는 나는 기교나 방법은 서툴러도 진정성과 열정만큼은 언제나 1등이었다. 멋진 시 한 편과 내 목소리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건 무대가 되었다. 시간만 되면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만덕호, 가우도 등 강진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내 시 낭송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바람아, 들어라. 바다야 들어라." 속으로 외치며 낭송을 이어가다 보면 일상의 묵은 감정과 스트레스까지 씻은 듯 사라졌다. 
 
밥을 하다 시를 외우기 시작하면 남편은 적당히 하라며 짜증을 냈다. 그러면 밥하다 말고 밖으로 나간다. 집 앞에는 황금 논이 지척으로 펼쳐져 있었다. 가을 벼들이 익어 고개를 숙이는 아침, 방울방울 맺힌 이슬에 바지가 젖는 줄도 모르고 "벼들아, 들어라."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논을 오가며 시를 외웠다. 보은산 길을 산책할 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봐도, 논두렁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왜가리들을 볼 때도 차를 멈추고, 잠시 내려서 조용히 들릴 듯 말 듯 시를 외워주곤 했다. 서툴면 어떠한가. 나의 목소리 타고 춤추듯 흘러나오는 시어가 세상에 흩뿌려질 때 더없는 행복과 만족감이 가슴 안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느즈막이 타오른 새로운 열정에 가슴 벅차하며 그날그날의 감정을 입혀 시를 읊었다. 김영랑의 '춘향', 이대흠의 '바닥', 이기철 '별까지는 가야 한다'까지. 허름하고, 빈틈이 많았던 삶에, 낯선 시어들은 웃음과 눈물이 되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슴에 사무치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매일 멈추지 않고 시 낭송을 이어갔다. 
 
시 낭송은 가슴으로 낳은 막내아들의 밤새 자장가도 되어주었다. 유행성 독감에 열이 높아 아이가 잠들지 못하던 밤, 더딘 재활 치료 과정에 속상해 울적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 평생 걷지 못할 것 같다는 의사의 최후통첩을 받고 눈물을 쏟아내던 밤, 불을 끄고 팔베개를 해준 아들의 귓가에 마치 기도처럼 시를 속삭였었다.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 이기철 <별까지는 가야 한다> -
 
비록 나의 삶이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발끝에 노래를 달고 이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 별까지 가야 하리라. 수많은 질문이 교차하는 인생의 행로 속, 삶을 담아 온몸이 울리도록 시를 외우며 나를 위로하고 현실의 고단함을 잊어 냈다. 삶을 이기는 약이고 다시 일어설 힘이 바로 시 낭송이었다.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다. 60여 년을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넘어야 할 산은 높고 연단의 고통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소박하게 다가온 행복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주는 시 낭송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 아름다운 울림은 내 삶을 온전히 바꾸진 못해도 적어도 나만큼은 웃게 만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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