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다산로]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 김재완 _ 시인
  • 승인 2023.05.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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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완 _ 시인

불현듯 차간 거리도 ATM기 앞에 줄서기도 단톡방 입장도 적당한 간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과학적인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사람과의 적정선을 유지한다는 이른바 불가근불가원 원칙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렇다. 직업상의 이유로 해외에서 장기간 체류하고 그만큼 사람들과의 관계 맺을 기회가 소원해질 즈음에 학창 시절 친구들 성정마저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희미한 기억에 걸쳐있던 얼굴마저 조로를 연상시키는 마스크로 더욱 깊이 숨기니 통성명을 생략하면 일개 타인이다.

자판기 커피는 빨리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기가 적당하다는 어느 작가의 조크가 세태의 씁쓸한 뒷담화로 들렸다. '식사 한번 하자?', '술 한잔하자?' 그것은 선한 다가섬인가? 그렇다. 그 후에 난 몇몇의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과 악수를 했고 늙은 듯 젊은 듯한 모습에 옛날을 찾았고 그들과 단단해졌다.

찌그러진 양재기 속에 막걸리가 있고 경계 없는 내 웃음이 있고 내 옆에 바싹 붙어있는 그의 불콰한 얼굴은 개구쟁이다. 이른바 너무 속속들이 알려고도 않고 그렇다고 무심함이 일상인 것도 아니게 그들과 촌스럽게 쿨하게 뭉쳤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반전이 있었고 소년기와 장년기의 훈장은 각각의 교복에 아우터에 달리해서 자리하고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자랑스럽기까지 하였으니 또다시 인생 총량의 법칙이 떠오른다.

커피숍에서도 키오스크로 세련되게 메뉴를 뽑아 드는 친구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선비 같은 친구는 신발 사이즈가 무려 300이다. 목소리만 컸지 마음은 영락없는 낭만을 구가하는 순정파로 '이해인' 수녀의 시를 좋아한다.

단답형으로 말하는 또 다른 그는 언제나 인내심을 요하는 스타일이나 그 깊은 마음이 장인이다. 이렇듯 개구리복을 슈트빨로 반전 시키는 세상에 무료함이라고는 1도 없는 그들과 나는 '나미'의 노래 가사처럼 늘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우리 두 사람 그렇게 빙글빙글 돌고 있다. 태양과 지구가 견우와 직녀가 목련 꽃과 이파리가 영원히 만나지 못한 것이 슬픔인 또 다른 과학 앞에 불가근불가원의 과학은 참으로 매력적이어서 다행이다.

그런 마음을 뒤로하고 4월의 출국이 던진 부산함으로 꽃밭과 채소밭에 물을 주고 말을 걸고 단장도 시키고 있었는데...

그래, 내가 너를 몰라볼까 네 걸음걸이를 모를까 네 울음소리를 모를까. 아! 『우물 안 개구리』 바로 그 녀석이었다.

우리 집의 역사 속에 자리한 우물은 지금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휴지기에 접어든 그 우물 안에 문제의 녀석이 어림잡아 6~7년은 살았다는 수학적 계산은 틀림이 없다. 난 집에 오는대로 녀석을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진심을 다해서 노력했고 결국은 이심전심인지 내가 친 그물에 녀석이 앙탈 부리듯 탑승(?)을 했고 구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비옥한 화단 깊은 곳을 찾아 녀석을 조심스럽게 놔두고 무사함을 빌어 주었다.

이따금 길냥이 울음소리와 함께 비 오는 날에 녀석의 개굴개굴 소리가 퍽이나 반갑기도 하더니만 출국하기 며칠 전에 엉금엉금 나온 폼이 추측건대 Long time no see! 동물이든 사람이든지 자기를 알아주는 것에 반응한다. 그래서 응답하면 적정선을 넘지 말라는 엄포를 한다. 때로는 야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한다.

오지랖은 수다스럽고 주책이란 어감이 있지만 때로는 정스러운 행위를 말하기도 하듯이 세상사 딱히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서로의 삶에 한 걸음씩 비켜서서 조금 낮은 톤으로 대문 밖에서 나를 불러주는 적당히 건조하고 적당히 친절한 관계를 원한다. '외로워서 독한 것은 강하지 않다' 방임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도 투정이다.

사람에게 하는 사랑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되는 선 순환적 생산재이다. 그 사랑을 두고 어떤 이는 속이고 거짓이라고 일갈하는 어깃장을 보인다. 관심과 관찰은 한끗 차이 같지만 지나친 관심은 자칫 스토커가 되나 지나친 관찰은 가히 에디슨이 되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므로 적당한 관심은 사랑이나 적당한 관찰은 게으름이란 사실이 아닐까?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되는 인연들이 있음에 감사하다.

알고도 모른 척 해주는 느긋함에 소심한 배짱까지도 멋지게 보인다. 삶이 알록달록해서 나를 무료하게 놔두질 않는다. 지금 나도 소심하게 그들을 칭찬하는 배짱을 보인다. 쑥스러움은 내 몫이고 그래서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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