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일제 강점기 우리네 이야기
가슴 아픈 일제 강점기 우리네 이야기
  • 강진신문
  • 승인 2023.05.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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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옛 이야기 - 남성리 영랑길 9]
군청 마당과 도각 거리(Ⅰ)

강진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9년부터 매년 '우리 동네 옛이야기' 책을 발간하고 있다. 책 편찬에는 강진 출신 김옥애, 강현옥, 장미연 동화작가가 글로, 김충호 화백이 그림으로 참여하고 향토사학자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의 감수를 받았다.
세 번째 펴내는 강진 이야기 동화책에는 남성리 영랑길의 역사, 문화 이야기 6편을 오일파스텔 삽화와 함께 책에 담았다.
'우리 동네 옛이야기' 남성리 영랑길 편에 가까운 옛날 실존했던 인물들과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강진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옛날 남성리 시가지

 


"기영아, 윤기영."
"예."
"순초 고모는 뭐하니?"
논일을 마치고 들어 온 아빠가 고모를 찾았어.

"순초 고모요? 방에서 수를 놓고 있어요."
틈만 나면 고모는 수틀을 손에 쥐었지. 여러 가지 색깔의 실로 새와 그네 모양의 수를 놓아갔어. 외동딸인 기영은 그런 고모랑 같은 방에서 잠도 자고 사이좋게 지냈어. 마치 친언니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만큼.

아빠가 이번에는 엄마를 급하게 찾는 거야.
"기영아, 니 엄마는?"
"부엌에요."

다른 날과 다르게 아빠는 허둥대는 듯 했어. 기영도 아빠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지.
"기영 엄마. 큰 일 났소."
"뭐가요?"
"우리 순초를 빨리 시집 보내야 될 것 같소."

도마 위에 놓인 김치를 썰던 엄마가 대답했어.
"안 그래도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어요."
기영도 머지않아 고모가 시집갈 거라는 걸 짐작했어. 고모가 수를 놓은 걸로 시집갈 때 가지고 갈 베개나 방석을 만든다 했으니까.

"기영 엄마, 어지간하면 순초를 후다닥 보냅시다."
"빨리 좋은 신랑을 찾아야지요."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여자들을 빨리 시집보내는 집들이 생겨났어. 기영 아빠와 엄마도 마음이 급해졌어.

일본 때문이었지.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일으켰거든. 그게 2차 세계 대전이래.

기영 아빠는 듣고 온 소문들을 기영 엄마에게 전했어.
"요사이 일본이 조선 처녀들을 끌고 간다고 합디다."
"뭐라고요? 어디로요?"
"북경이란 말도 있고 남양 군도로 데리고 간다고도 하고……."
"어머나!"
"그러니 순초한테 방에 꼭 숨어 있으라고 당신이 잘 타일러요."
"걱정 마요."

 


기영의 집은 군청 바로 옆이었어. 도각(도가)거리 동쪽(현재 군청 주차장)에 있었지. 남성리 탑동 사거리를 옛날엔 도각(도가)거리라 불렀단다.

기영의 집 앞마당은 텃밭이고 뒤란과 옆은 대밭으로 둘러져 있었어. 대밭엔 굵은 대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어. 그 대밭의 싸리 울타리가 군청과 경계를 이루었고.

기영은 심심할 때 혼자 대밭 언덕으로 쪼르르 올라가곤 했어. 옆집에 희생이가 살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함께 붙어 있을 순 없었으니까.

대밭 울타리 너머로 군청과 군청 마당이 훤하게 잘 보였어.
군청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밖으로 나온 희생이 아버지도 봤어.
기영은 군청 건물 뒤쪽으로 웃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활짝 열려 있는 군청 정문을 구경하듯 바라보았었지. 그러다가 대밭에서 내려와 고모 방으로 가곤했어.

그날 밤 기영은 순초 고모와 나란히 누웠어. 키가 큰 고모는 흰 피부에 까만 머리가 치렁치렁했어.
"고모."
"왜?"
"아직도 수를 많이 놓아야 해?"
"응."
"맨날 수만 놓고 있음 싫증 안 나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뭘……."

밤이 깊어질 무렵이었어. 옆집 희생이 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 희생이 엄마 목소리가 카랑카랑했어.
"고모, 부부싸움하나 봐."
"또 왜 싸우지?"

아픈 할아버지 때문에 희생이 엄마와 아빠는 자주 다투었어.
그날따라 희생이 엄마의 말소리가 담을 넘어 왔어.
"영자를 왜 보내요! 한 식구나 다름없는데......"
영자 언니는 어렸을 적 어떤 아줌마가 맡겨 놓은 아이였대.

그 후 희생이 집에서 자랐다고 했어.
희생이 엄마는 몹시 마땅치 않은 목소리였어.
기영은 순초에게 물었지.
"고모, 영자언니를 어디로 보낸다는 걸까?"

희생이 집은 식구가 여럿이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빠, 엄마. 부엌일을 하는 영자 언니. 희생이 동생과 오빠들 등등.
영자 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병든 할아버지의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도맡았어.

"그러게."
고모와 기영은 옆집 일이라서 자세히 알 순 없었어.
"이미 결정이 난 일이라니까."
"영자 생각이 중요하지 왜 당신이 억지로 보내요?"

영자 언니 일로 집 식구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한 것 같았지만 희생이 엄마는 더 이상 따지질 않았어.
순초는 기영의 배 위에 얇은 이불을 덮어 줬어. 휴우, 긴 한숨을 쉰 순초는 천장을 바라보았지. 태평양 전쟁 중인 일본은 언제쯤 전쟁을 끝낼 것인가. 일본 순사가 조선 처녀들을 일본으로 데려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 순초도 살살 불안감이 스며들어 왔지.

"기영아, 이제 그만 자자."
다음날 오후였어.
기영은 희생이랑 군청 마당 귀퉁이에서 토끼 풀잎들을 땄지. 둘은 소꿉놀이를 했어.
군청 마당은 기영과 희생이의 작은 놀이터도 됐지만 어른들의 정구치는 운동장으로도 그만이었지. 그들은 둘이 혹은 넷이서 편을 갈라 정구를 쳤어.

군청에서 일을 한 희생이 아버지와 일본 사람들이 정구를 치려고 마당으로 나왔어. 몰랑몰랑한 정구공이 군청 정문 쪽까지치솟아 날아갔어.
벌떡 일어난 기영은 그 공을 주우러 군청 정문 쪽으로 달렸지. 딱딱한 공으로 시합을 하면 경식 정구라 한대. 부드러운 고무공을 사용하면 연식 정구이고. 군청 마당에선 값이 싼 고무공을 가지고 연식 정구를 했었지.

라켓을 들고 공을 치는 희생이 아버지를 보면서 기영은 문득 아빠 얼굴을 떠올렸어.
'우리 아빠도 군청 마당에서 정구를 치면 좋겠다.'
밭과 논에서 농사일만 하는 아빠는 농부였거든. 아빠는 대밭안으로 날아와 떨어진 정구공을 군청 마당으로 휙 던져 줄 때도 있었어.

한바탕 공치기가 끝난 희생이 아버지와 일행들은 동백나무와 벚나무 아래에 앉아 땀을 닦았어. 물도 몇 모금씩 마셨어. 모두들 웃으면서 운동 후의 상쾌함에 젖은 거야. 그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어.

"북산 바람이 시원하니 좋구나."
"운동을 하고 나면 무거웠던 몸이 개운해지니까요."
"우리 군청에 이렇게 운동 할 수 있는 마당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강점기 시절 군청 마당은 연식 정구를 치는 사람들의 즐거운 공간이었지.

그 무렵 군청 마당엔 어린 여자들이 모여들었어.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여자들……. 그들은 순초 고모 또래의 처녀들이었지.

전쟁을 계속하다 보니 일본의 군수품 공장에서는 일할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었대. 그래서 조선, 중국, 필리핀 등의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 대신 일을 시켰던 거야.

그러니까 그 처녀들은 일본 군수공장(군수물자를 만들어 내는 공장)에서 군수품(군대 유지와 전쟁을 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본으로 끌려가느라 모였던 거야. 즉 '조선여자 근로정신대'가 될 사람들이었지.

일본 순사의 말에 의하면 먼저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북경이나 남양 군도로 옮겨 갈 수도 있다는 거야.

기영은 대밭 울타리 가에 서서 모인 여자들을 구경했어. 그들이 주고받은 말소리가 기영의 귀에까지 들렸어.
"북경은 또 어디지?"
"몰라. 공장이 있는 곳이겠지. 거기서 일한다잖아."
"난 돈 모아 빨리 돌아올 거야."
"나도."

군청 마당에 모인 처녀들은 불안해 하기도 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것도 같았어.
다음 날도 기영은 낮은 대밭 언덕으로 올라갔어. 울타리를넘어 군청 마당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자리에 서 있었지.

스무 명 남짓 된 처녀들이 군청 마당으로 모여들었어. 그녀들은 전날처럼 일본 순사가 시키는 대로 했어. 떠나기 전에 간단한 훈련을 받는 거였지.
일본 순사가 소리쳤어.

"마에니(앞으로) 스스메가(가)!"
여자들이 어깨를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어.
"야스게(쉬어)!"
그들은 걷다가 제 자리에 멈췄지.
아, 그런데. 여섯 명씩 세 줄로 선 처녀들 중에 영자 언니의 모습이 보였어. 검정 치마에 검정고무신을 신은 영자 언니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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