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공자(孔子)의 생각 엿보기
논어(論語), 공자(孔子)의 생각 엿보기
  • 강진신문
  • 승인 2023.04.1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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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권의 다시 보는 중국의 고전 (21)

김점권 전 센터장은 도암출신으로 전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포스코 및 포스코건설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포스코건설 북경사무소장을 거쳐 중국건설법인 초대 동사장을 지냈다. 이어 광주테크노피아 북경 센터장을 거쳐 교민 인터넷 뉴스 컬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25년간 생활한 역사와 고전, 문학류를 좋아하는 김 전 센터장을 통해 중국고전에 대해 새롭게 접근해본다. 편집자주/

 

 <논어(論語)>는 지금부터 약 2500년 전, 춘추시대 말기에 사상가로 활약한 공자(孔子)의 말씀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 <학이편(學而編)>에서 <요왈편(堯曰編)>에 이르기까지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략 5백 개 정도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어>는 인간과 인생 그리고 정치에 대한 공자의 감상과 의견을 정리한 책으로서,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仁)'을 기초로 한 인간론(人間論), 인생론(人生論), 정치론(政治論), 지도자론(指導者論)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체계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것이 <논어>만의 독특한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孔子)는 누구인가? 공자는 기원전 551년(BC 551~ BC 479) 중국의 산둥성 곡부(曲阜)에서 하급 귀족 무사인 아버지 숙량홀과 어머니 안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19살에 송나라 출신 여인과 결혼했다. 20살 때부터 노나라 실권자인 계씨 가문의 일을 봐주면서도 꾸준히 주나라의 예법을 공부해서, '예(禮)'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48세 때 계손 씨의 가신 양호가 정권을 잡자 공자는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공자는 사공(司空)과 대사구(大司窛)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이 제나라 경공과 회담할 때 공자가 의례를 맡아 노나라가 빼앗긴 땅을 되돌려 받음으로써 공자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공자 일생 중 가장 봄날인 셈이다.

그러나 노나라의 정치 실세인 삼환 씨 세력을 타도하려다 실패하고, 제자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제국의 유랑 생활에 접어들었다. 이후 14년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기원전 484년, 68살의 나이에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공자는 노나라에서 악(樂)을 재정비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문헌을 정리하는데 전념했으며, 기원전 481년 (71세)에 춘추(春秋)를 완성했으며, 기원전 479년 73살 때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삶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정치와 문화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실패했는가? 결코 아니다. 공자는 한(漢) 무제 이후 비록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사상계의 패자로 우뚝 솟은 것이다.

동양의 성인, 유학의 종주로서 공자가 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역사의 스승으로서 대접을 받는지 논어의 상징적인 내용 몇 가지를 통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인생의 고행자로서 바람직한 인간의 길을 얘기하였다. 공자는 후세에 성인으로 불리다 보니 다소 신격화되었지만, 공자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 가장으로서 삶의 온갖 고난을 직접 경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말 중에 "가난해지면 세상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 쉽다. 가난하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는 부자가 되어서 교만해지지 않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다."라는 말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평생 신조로 삼을만한 조언을 부탁한 자공에게 공자는 "서(恕)가 좋겠군, 내가 원하지 않은 바를 남에게 행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네" 여기는 서(恕)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예의인 셈이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묻기를 "스승님, 이상적으로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는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면 안심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친구에게는 '저 사람이면 믿을 수 있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서는 '저 사람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둘째는 위기 속에서도 적극적이고 당당한 삶의 자세 유지한 것이다. 수많은 고행자 중에서도 공자가 특히 존경받는 것은 힘든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비로소 설 수 있었으며 40세에 미혹됨이 없었다.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귀에 들리는 것이 거슬림이 없었으며, 70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 글은 만난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온 공자의 일생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공자가 각국을 돌면서 유새 활동을 펼치던 어느 때, 그 일행이 적국 병사들에 포위되어서 꼼짝 못 하며, 피곤에 지치고 굶주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공자만이 의연했다. 보다 못한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군자도 곤경에 빠집니까?"라고 원망하자, "군자도 곧잘 곤경에 빠진다네, 다만 소인은 궁지에 빠지면 마음이 동요되지만, 군자는 어떤 곤경에 처해도 마음의 평정을 이루지" 공자는 강인한 성인이었다. 공자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힘든 역경 속에서도 이상적인 인간상을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공자는 친구를 선택하는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먼저 유익한 벗 세 종류는 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 피해야 할 벗으로는 손쉬운 일만 하려는 사람,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성의 없이 말하는 사람을 꼽았다. 아울러 공자는 보이지 않은 신(神)에 대해서는 "신(神)을 섬기기 전에 우선 사람을 섬기라"라고 했고, 죽음에 대해서는 "사는 것도 모르는데 하물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했다.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현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같은 사회생활에 임하는 자세에 관심을 보였으며,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信)'이라고 했다.

공자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무엇인가? 공자는 한평생 자아를 완성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람직한 인간상을 갖추기 위해 가장 중요시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仁)'이다. 도대체 '인'이란 무엇인가? 공자는 '인'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상대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했다.

즉,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사람치고는 선한 이가 드물다",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 수가 적은 사람은 '인'에 가깝다"라고 했으며, 이해력이 부족했던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수차례 '인'에 대해서 묻자, "인이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다음에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노력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마지막에는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람들에게 성의를 다하는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답변을 했다. 결국 '인(仁)'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주장하는 '군자'의 조건은 무엇인가?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는 배움을 갖춘 사회 지도자를 칭한다. 지도자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려면 능력과 인격을 두루 갖춰야 한다.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무릇, 군자는 민첩하게 일하고 신중하게 말하며 유도(有道)를 따라 바로잡는다" 또 다른 말로 "군자는 말에는 더디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는 민첩하다"라고 했으며, "군자는 긍지를 가지나 다투지 않으며,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는 하나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 또한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다"라고 했다.

즉 공자가 주장하는 군자의 조건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은 행하고, 그 몸가짐이 부정하면 호령하더라도 아랫사람은 따르지 않는다."이다.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던 공자는 살아있는 동안 일견 실패했으면서도, 왜,죽어서 수천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잊혀지지 않는것일까? 공자와 유교가 지닌 보수적이면서 체제 안정을 주장하는 성격이 통치자의 지배이념으로 적합했기 때문 일 수도 있지만, 쉽게 달성할 수 없는 지독한 이상주의가 항시 가까이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다가설 수 없는 태양과도 같은 목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는 것 만큼 세상이 보인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논어는 결코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어겼을 때, 지긋이 바라다 보는 선각자가 두렵고 불편하다. 그러나 공자도 생전에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지만,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인지 길을 알려 준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사람 사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논어 속에 시대를 뛰어넘는 묘한 길이 있다.

<논어>에 언급된 명언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다.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사람치고는 선한 이가 드물다"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에 얻어지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선한 말을 한다", "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는 법이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 [참고 문헌: 중국 3천년의 인간력, 사기열전, 네이버 지식백과의 공자, 김용옥의 만화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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