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보톡스
[기고] 보톡스
  • 이선옥 _ 신전면
  • 승인 2023.04.1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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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 _ 신전면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보톡스의 유혹에 시달린다. 깊게 골이 패인 미간의 주름, 양 눈가를 점령한 까마귀발주름,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팔자주름까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심란하다. 화장품을 덧바르자니 패인 주름 사이로 화장품이 스며들어 주름은 더 도드라져 보이고, 화장을 안 하자니 거뭇한 기미가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가리고 꾸며도 노화란 녀석은 시간을 타고 들어와 온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주름 개선용 로션이며, 기미 제거용 마스크 팩, 아이크림 등등 숱한 방패로 막아보려 해도 여기저기 골을 내기도 하고 검은 발자국을 찍어대며 막강한 힘을 과시한다. 이렇게 쭈그러지기 전에 진즉 강력한 무기로 맞서야 하지 않았을까? 보톡스 몇 방이면 패인 골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레이저 몇 번만 쏘아대면 검은 발자국도 흔적 없이 사라져 최소 10년은 젊어 보일 텐데, 여태껏 머뭇거리며 타박만 하고 있었다.

노화가 눈을 강타했을 땐 다초점 렌즈로 맞짱 떴다. 머리칼을 공격했을 땐 염색약이란 간단한 무기로 대응할 수 있었다. 목을 가로질러 띠를 치고 있는 굵은 주름까지도 스카프나 목까지 올라온 옷으로 감추면서 그런대로 잘 버텨 왔다. 하지만 얼굴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상상하는 대로 피부가 균형 있고 매끈하게 펴져서 젊을 때의 얼굴로 되돌려 준다면 몰라도 잘못되면 피부에 진흙을 이겨 발라 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움을 과연 참을 수 있을지, 오랜 세월 좋든 싫든 함께 살아서 익숙해진 얼굴인데 갑자기 변한 낯설고 생소한 모습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 끝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인터넷 창에 보톡스 시술이란 글자를 쳐보았다. 보톡스 비용, 보톡스 후 피부관리, 보톡스 시술 후 주의 사항 등 보톡스에 관한 수많은 정보가 우수수 쏟아져나와 일렬종대로 줄을 섰다. 보톡스 시술 병원과 보톡스 크림 선전 사용 후기까지 친절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친절할 수가 없다. 시술 후 걱정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젊어지고 예뻐질 기대감에 기분이 날개를 달았다. 그래, 큰맘 먹고 한번 도전해 보는 거다. 누군가는 쌍꺼풀 수술이 인생 도약의 발판이 됐다는데 그런 거창한 꿈은 아니라도 늙은이 취급은 면할 수 있지 않겠나.

얼마 전 병원으로 건강 검진을 갔다. 간호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문진표를 내밀었다. "어르신, 제가 작성해드릴 테니 묻는 말에 대답만 하세요" 독해력도 부족한 중늙은이처럼 보였을까. "내가 할게요" 문진표를 잡아채고 말았다. 알량한 자존심이 성질을 부린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간호사도 놀랐는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모기만 한 소리로 일단 사태는 수습했으나 한편으로는 늙은이 취급당해 억울하고, 한편으론 순수한 친절에 무례한 행동으로 성질 더러운 늙은이를 그대로 보여줬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그러잖아도 찌그러진 자존심이 맥을 못 추고 며칠 밤잠을 설치게 했다.

그래, 노화는 겉모습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고 했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와 혈관, 뇌까지. 몸은 늙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하지만 그건 늙음을 부인하고 싶은 노인들의 푸념인 거다. 늙으면 마음에 탄력이 떨어져 작은 일에도 삐지고 사고도 유연하지 못해 고집만 세지는 거란다. 아무리 얼굴을 팽팽하게 펴본들 노인을 벗어날 방법은 없는 듯하다.

노화는 지극히 정상적인 자연 질서의 흐름인데 늙음을 허용하지 못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인지 모른다.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알약 하나로 간단히 해결하는 어느 SF 소설처럼 노화란 지독한 녀석을 보톡스 한방으로 완벽하게 퇴치할 수 있다면, 노인이란 단어는 사전에서 사라질 것이고 고령화로 인한 사회 문제도 간단하게 해결될 텐데 말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태어날 때부터 늙어가는 법. 잘 관리한 골동품일수록 그 고유의 멋이 돋보이듯이 마음과 몸을 잘 가꾸어 멋스러운 어르신으로 늙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마음의 주름을 펴줄 보톡스를 찾아서 인터넷 창에서 서점 사이트를 접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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