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박새, 직바구리-
[다산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박새, 직바구리-
  • 김성한 _ 수필가
  • 승인 2023.03.2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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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_ 수필가

해외여행을 한 후에는 항상 기행문을 써 두었었다. 그런데 유독 유럽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쓰지 않았다. 시차 때문에 미루다가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한데 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그 차이가 많이났다. 기행문을 쓴 후에 그것을 간혹 한 번씩 꺼내 읽으면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 났다. 그런데 쓰지 않았던 여행은 감흥은 커녕 그 기억조차 가물가물 잊혀져 가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에 대한 취재기사를 읽었다. 달갑지 않은 정치인 얘기고, 신문 또한 별로 접해 본 적이 없는 중앙의 모 경제지였다.
 
어떤 인물의 삶이나 근황에 대해 쓰는 취재기사는 기자의 필 끝에 따라 터무니없이 부풀려진다. 그래서 사람, 그것도 정치인을 취재하는 글은 별로 읽지 않는다. 
 
그런데 제목이 좀 특이했다. 주제가 「하루 2만 보를 걷는 왕의 남자」이고 부제(副題)가 「아침 등산으로 명상, 밤 일기로 성찰」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5선 의원이었고 특임장관까지 지냈으며, 민주화운동으로 다섯번의 투옥경력까지 있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중견 정치인이었다. -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2만 보를 걷는다고 했다. 
 
사진 속 그의 서재엔 그가 쓴 일기책이 키만큼 높게 쌓여있었다. 그것도 민주화운동 시절, 중앙정보부가 가택수색을 하면서 일기를 모두 가져간 뒤 돌려주지 않아 그 후부터의 것이라고 한다. 
 
일기를 그렇게 쓰게 된 이유를 묻자 자기 성찰이라고 했다. 하루를 끝내고 저녁에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오늘 나는 뭘 했느냐를 기록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인상 깊게 읽은 기록에 관한 한편의 글이다. 제목이 '천 마디의 말보다는 한 줄의 글' 이었다. 그 글을 쓴 사람도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썼는데 그 요지 중 일부분이다.
 
「기록해서 기억하면 태양이고 기억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곧 암흑이다. 뇌 기록은 금방 사라지지만 백지 위의 기록은 천년이 간다. 죽으면 인간의 영혼은 즉시 흩어져 소멸되고, 육신 또한 곧바로 썩어 흙으로 변한다. 살아남아 있게 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삶과 정신의 궤적인 기록뿐이다.」
 
그는 또 현 나이가 79세인데 아직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 후 산을 오른다고 했다. 아침에 산 위에서 하는 운동을 포함하여 그 걸음 수가 1만 2천 보가 되며, 지하철을 타고 걷는 등의 일상적인 활동으로 8천 보를 채워서 하루에 2만 보를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건강에 대해서는 자신을 하고 있고, 감기는 물론 그토록 요란했던 코로나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8천 보가 된다, 라고 하지 않고 채운다 라는 말이, 걷기에 대한 그의 의지와 집념을 엿보이게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죽어가면서 자기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는데 그것이 즐거웠던 것이면 온화한 미소를 띠고, 괴로웠던 일이면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었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자기가 이룬 재산과 명성 등 모든 것이 다 구름과 바람 같은 것이었고 정작 필요했던 것은 건강이었는데 왜 그토록 챙겨야 할 것은 멀리하고 부질없는 것들에 연연했던가 하고 후회를 하며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가장 큰 어리석음은 다른 종류의 행복을 위해 건강을 희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부(富)는 호화로운 저택과 금은보화가 아니고 건강이다」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 올랐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도, 재화와 보물이 창고에 가득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재보만고 건실무용: 財寶滿庫 健失無用)라고 했었는지 모르겠다.
 
일기와 건강을 지상의 명제로 살아가고 있는 한 노 정치인의 삶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이 모처럼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봄이 오는 길목이다. 우수도 지나고 내일모레가 경칩이다. 그러나 아직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끝이 차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산을 오르려는데 뜨락의 소나무에 산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그 모습이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다. 저 새의 이름이 박새 라고 하던가, 직바구리 라고 하던가? 기록을 해 놓지 않아 그 이름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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