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다산로)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 김제권-수필가
  • 승인 2023.03.1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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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이 지나고 춘분을 향해 달려가는 봄의 길목에 동백과 산수유가 실눈을 뜨고 상춘객의 눈 맞춤을 고대하고 있다. 지리산 골짜기 잔설이 녹아 실개천에 닿을 때 봄의 전령사는 매화나무 가지 끝에 앉아 꽃 나팔을 분다. 

해마다 이맘때쯤 섬진강변 '매화마을' 일대에서 축제가 열린다. 혹여 놓칠세라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꽃구경을 떠난다. 유유자적 흐르는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가로수를 보니 가지 끝마다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린아이 살결처럼 연하고 보드라운 섬진강가 흰 모래톱이 봄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난다. 광양군 다압면 '홍쌍리매실농원' 행사장 주변은 손님을 맞으려고 캐노피 천막이 즐비하게 서있다. 매화동굴 속을 걷다보니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거린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건너편 섬진강 줄기와 매화꽃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하느라 분주하다. 꽃말에 고결과 인내를 상징하는 홍매(紅梅)가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매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과 묵객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동양화에서 군자와 같은 뜻을 가진 매난국죽(梅蘭菊竹)에 매화를 맨 앞에 세운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 듯싶다. 다음 시는 조선 중기 문인 상촌 신흠(申欽, 1566~1628)의 시집 '야언(野言)'에 수록되었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평생을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고 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그대로 남아 있고 月到千虧餘本質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柳經百別又新枝

매화꽃이 만발한 '홍쌍리매실농원'은 나에겐 잠시 동안 머리를 식히며 지나가는 눈요기 정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농원을 일군 주인의 억척스런 삶의 모습과 의지가 한눈에 그려진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피와 땀의 결실이며 분신과도 같을 것이다. 척박한 산을 깎고 계단을 만들어 비탈에 조경을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조를 생명처럼 여기던 선비들이 매화를 우대했던 것은 추위를 이겨내는 기개와 옥처럼 맑고 깨끗한 색채와 은은한 향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불의에 굽히지 않는 속성을 고결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조선 중기 유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시집 '우설월중상매운(又雪月中賞梅韻)'에 수록되었다.
화분의 매화가 맑고 아름답게 피고        盆梅發淸賞
시냇가의 눈은 찬 물가에서 빛나네.       溪雪耀寒濱 
얼음 같은 달그림자 다시 나타나서        更著氷輪影
섣달임에도 봄기운을 일러 주는구나.      都輸臘味春
멀고도 아득한 낭풍원의 선경에           

막고산 신선처럼 곱고 예쁘구나           

시를 읊느라 고심하게 하지 말게          莫遣吟詩苦
시가 많으면 단지 티끌과 같다네.          詩多亦一塵

속세를 떠나 강변에 초가집을 짓고 평생 장가도 가지 않고 홀로 담박한 삶을 살았던 송(宋)나라 시인 임포(林逋)는 아내와 자식이 없는 대신 주변에 매화나무를 심어서 아내로 삼고 학 두 마리를 자식으로 삼고 기르며 살았다. 

이처럼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매화를 사랑했던 만큼 읊었던 시도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는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열린 탐스런 열매가 자라면 숙성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건강식품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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