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동성리 출신 국악인 나금추를 아시나요?
강진읍 동성리 출신 국악인 나금추를 아시나요?
  • 강진신문
  • 승인 2023.03.1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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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악단의 역사...전라도 맥을 잇는 독보적 상쇠

강진민속문화연구소 윤성렬 대표를 통해 지역 대표 국악인인 나금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윤 대표는 남도대학 강사를 지냈고 판소리 고법 중요무형문화재 5호 김성권 선생님의 전수자 이기도 하다. 지역의 국악인에 대한 관심을 하나씩 자세하게 풀어내 본다. /편집자 주

 

호남 우도 여성농악단은 해방 이후 조직된 전문 연희패로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는데,  '남원여성농악단', '전주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한미여성농악단', '정읍여성농악단' 등이 있었다. 

특히 여성농악단은 주로 전라북도 지역에서 조직되었고 호남우도 가락을 연주하였던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남원과 같이 좌도권에서 구성된 여성농악단에서도, 가락은 우도가락을 사용함으로써 해방 이후 우도농악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전라북도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여성농악단의 존재는 전라북도의 농악이 어느지역의 농악 보다도 앞서 고도의 예술성과 연희성을 획득했을 개영성을 시사하는 요인인 바, 이른바 뜬쇠들에 의해 구성된 이러한 「연예적인 판굿」의 완성은, 전라북도 지역의 토착농악의 수준과 열기가 대단하였고, 이러한 토착농악의 높은 수준은 곧 농악이 포장걸립이라는 전문 연예농악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호남 우도 여성 농악단의 중심에는 우리 고장 출신으로 강진읍 동성리 출신의 나금추(羅錦秋. 본명 : 羅模女. 1938년 2월 2일 생, 호적에는 1941년생) 명인이 상쇠를 맡아 중추적으로 활동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성농악단의 역사는 곧 나금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동성리에서 출생하여 7세 때에 광주로 이거하여, 그 곳에서 대성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17세 때 '임춘앵 창극단'의 공연을 보고 국악의 멋에 반해 버린 그는 그 길로 집을 나와 남원국악원에 들어가 판소리와 농악을 배우게 되었다. 언니라고 부르던 장홍도가 상쇠를 맡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징을 치며 굿판을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재질을 인정 받아 전남의 김재옥에게서 쇠를 배워 본격적으로 전문 농악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60년대 초에 전라북도 권에서 조직되어 일세를 풍미했던 여성농악단의 상쇠를 도맡아 했는데, 여성농악단은 주로 난장을 튼 곳의 넓은 공터에 하얀 포장을 치고 관객들의 입장료를 받았던, 포장걸립 형태의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연예농악을 치던 단체였다. 여기에서 나금추는 고운 용모에다, 다양하고 세련된 가락 구사와 진풀이 솜씨와 함께, 뻣상모를 이용하여 구사했던 농악의 웃놀음인 여러 가지 부포짓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나금추는 21세 때까지는 '남원여성농악단', '춘향여성농악단'에 소속되었으며, 21세에 전주의 장금동과 혼인하면서 전주로 이거 하였다. 전주에서는 명고수로 활동하다 1990년에 작고한 김동준, 그리고 수궁가로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인 홍정택에게 판소리를 수업하여 1983년 제 9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에서 장원에 입상하기도 하였다.

25세 때에 다시 '아리랑 여성농악단'의 상쇠를 맡았는데, 이후 38세 때까지 이순태, 장금동, 이방근이 운영하던 '전주여성농악단', 이수복이 이끌던 '호남여성농악단', 권일상이 만든 '정읍여성농악단', 이정범이 창단한 '한미여성농악단'의 상쇠로 활동하였다.

나금추가 활동하였던 남원여성농악단은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85년 10월에는 강릉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이리농악단 상쇠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나금추에게는 개인 연기상도 동시에 주어졌다. 이후 활발한 활동으로 현재 호남우도농악을 대표하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나금추가 치는 농악은 '연예농악'으로서의 판굿이다. 그의 판굿은 전통사회에서 정초의 걸립이나 마당밟기, 장원례 등의 끝에 '파접례'로서 치러졌던 판굿이 아니라, 해방 이후 현대 농악의 새로운 시발점인 포장걸립 농악으로서의 판굿이다. 이러한 포장걸립농악의 판굿은 농악 자체가 연희의 목적이고 그 자체가 바로 재원 획득의 수단이 되었던, 새로운 의미의 판굿인 것이다. 지금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농악경연대회는 이러한 맥락 위에 차러자고 있는 행사라 할 것이다. 생활 현장에서는 잊혀지고 잃어버린 농악의 그 다양한 소리들 중에서, 과거의 향수를 제물로 전통의 복원을 명분으로, 그나마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판굿인 셈이다.

나금추는 1960년대 초반부터 전문적인 '뜬쇠'로서의 여성농악단에서 활동하였고 1980년대에는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일반 농악단의 상쇠로도 당당히 활동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농악은 대대 남자들 만의 놀음이었다. 잡색중에서 성별로 여자인 각시나 처녀와 같은 역할을 지금도 남자가 대신하여 노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터에 여성들로만 구성되었던 농악단의 등장은 가히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호기심 유발은 물론이려니와 상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한편 여성농악단이 순회 공연을 할 때는, 하루쯤 전에 목적지에 당도하여 소위 '마찌말이'라고 불리던 가두선전을 벌였는데, 이 때 농악단의 이름과 초청자 등의 내용을 적은 프랑카드를 들고 굿을 치며 거리를 돌아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포장걸립의 공연에서는 농악뿐만 아니라, 간단한 간이식 무대를 설치하여 토막극 공연을 함께 이루었다고 한다. 

나금추는 국내에 3대 상쇠로 알려진 유지화, 이옥주, 나금추 중에 유지화, 이옥주는 전라도가락과 경기도가락이 어울려 있으나 나금추만이 전라도가락의 맥을 독보적으로 지켜오고 있다는 평가를 한다. 또한 부포놀이를 바탕으로 한 상쇠춤의 기능인으로서 춤사위나 그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부리는 기교가 엄쳐 그의 꽹과리 소리는 '신령이 감동하는 소리'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동작은 기예가 완숙한 선녀놀이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의 상모의 두루미털은 전후, 상하, 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꽹과리채를 저으며 춤을 추면서 학이 나는 듯한 상쇠놀이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리에도 남다른 소질과 기량을 지니고 있는 나금추는 전라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 후학 양성 및 다양한 대내외적 활동을 하다 2018년 6월 11일 새벽에 타계했다. 

나금추 선생 약력

-1938년 2월 2일 강진읍 동성리 출생(호적에는 1941년생으로 되어 있음)
-1954년  광주국악원 입단. 정광수에게 판소리 춘향가 사사.
-1955년  남원국악원에서 김영훈에게 판소리 춘향가 사사.
-1957년  강도근에게 흥보가 사사.
-1959년  남원여성농악단 입단.
-1960년남원춘향여성농악단 상쇠
-1963년  전주 김동준에게 판소리 심청가 사사.
-1964년  전주 총정택에게 수궁가 사사.
-1965년  아리랑 여성농악단 상쇠.
-1966년  정읍여성농악단 입단,
-1972년  국악협회 전북지부 농악분과 위원장.
-1978년  전주여성농악단에서 상쇠. 
-1985년  이리농악단 상쇠로 제 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 수상.
-1987년 12월 31일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7-1호 지정 전라북도문화상 수상.
-1987년~2001년 전북도립국악원 교수.
-2009년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공연
-2011년~2018년 전북 부안우도농악 전수관에서 후진양성 및 다양한 활동.
-2018년 6월 11일 새벽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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